안사의 난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사의 난의 주동자가 안녹산과 사사명이라고 하는데요.
무슨 이유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건가요?
안녹산은 외국인 아니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사의 난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왕조(618∼907)는 현종(玄宗:재위 712~756) 때 국력이 절정에 달하였고 전통문화도 집대성되어 외형적으로는 화려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초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온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 및 조용조 세제의 이완, 부병제의 붕괴 등으로 왕조의 기반이었던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화하였습니다.
당왕조는 토지와 유리된 도호를 조사하고, 전지와 재산에 대한 과세, 모병의 조직화 등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존속을 꾀하려 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억압되었던 귀족들이 현종대에 들어와 세력을 잡았고, 관료층 중에서도 구래의 문벌귀족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대토지 소유제의 전개, 상업자본의 이용 등으로 새로 진출한 교양인이나 지주·상인층 출신의 능리(能吏)와 대결하여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세력을 잡은 문벌·귀족 출신의 재상 이임보 등은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고, 세력유지를 위해 변방 절도사로 이민족이나 평민 등도 등용시켰다. 특히 징병제가 파탄된 후, 절도사들은 대량의 용병을 지휘하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현종·이임보·양귀비 등에게 신임을 받아 유주·평로 ·하동의 절도사를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을 때, 이임보가 사망하자 중년을 넘기면서 정무에 지쳐 양귀비와의 애욕생활로 나날을 보내던 현종 밑에서 재정을 장악한 양귀비의 일족인 재상 양국충은 동북 국경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번장 안녹산과 대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원 말년 사회 안정이 지속되자 황제를 비롯해 관리들이 향락을 추구, 특히 현종은 귀비 양옥환을 총애하여 정치를 보살피지 않고 이임보와 양국충이 차례로 집권했으며 환관 고력사 등을 신임하여 정치는 날보 부패해갑니다. 또 천보 원년에 지방 열곳에 병진을 두고 장관을 절도사라고 불러 번진이 되었는데 이들이 정치, 군사, 재정 대권을 장악하나 절도사로 나간 사람이 그 임무를 마치고 중앙에 돌아오면 재상이 되므로 이임보는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호족 출신을 등용해 절도사로 내보냅니다. 이로부터 당의 국력이 쇠퇴해 이를 천보의 쇠 라고 하며 당은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바뀌게 됩니다.
안록산은 호족 출신으로 이러한 이유로 절도사가 되었고, 세력을 키워 정치적으로 양국충과 대립, 그리하여 그는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천보 14년 반란을 일으킵니다.
먼저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황제라 칭한 후 장안을 공격하자 현종은 창황히 사천으로 도망, 현종은 그 도중에 양귀비를 자살하게 하고 영무에서 숙종에게 양위해 이 난을 평정하도록 합니다.
이때 안록산은 그의 아들 경서에게 살해되자, 삭방 절도사 곽자의가 회흘병을 이끌고 장안과 낙양을 수복, 이 토벌 작전에서 안록산의 부하 사사명이 귀순해 범양 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안경서가 업으로 도망가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사사명은 안경서를 죽이고 스스로 대연황제라 칭하고 다시 낙양을 점령, 다행히 하동 절도사 이광필이 하양을 견고하게 지키고있어 그 세력의 확대는 막았습니다.
얼마 후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에게 살해되어 세력이 점차 약해졌으며 대종 광덕 원년에 사사명의 부하였던 전승사, 이회선이 당에 투항하고 사조의도 부하들의 압력 아래 자살해 8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평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