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맞은 여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조선에서 양반가에서 소박맞아 친정으로 되돌아간 여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대로 친정에서 거주하는게 가능했나요?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소박 맞은 여인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하군요.
마을에 가면 "서낭당"혹은 성황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놓은 곳으로, 장승이 서있기도 하고, 오색찬란한 천들이 나무에 묶여 있어
기괴하거나 무섭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여성, 그 여성이 이혼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생을 소박데기란 오명으로 따가운 눈초리를 받거나, 고향집에서 가문의 수치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차가운 현실에 내몰리게 되기 쉬웠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나온 독특한 관습이 습첩이라고 합니다.
말뜻 그대로를 풀이해보자면 "첩을 줍다"는 뜻인데, 실제로 이혼한 여인들이 새벽 동이 틀 무렵 [서낭당]에
나가 있으면, 그녀를 가정 먼저 본 성인 남자가 여인을 거두어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남자는 기혼이건 미혼이건, 양반이건 상관이 없었고,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를 꼭 따라가야만 했다고 합니다.
주로 노총각들이 배필을 데려가려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이 좋을 때면 어사나 낙향하는 관리, 혹은 지방 수령으로
발령 가는 벼슬아치를 만나, 팔자를 고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여성, 그 여성이 이혼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소박데기란 오명으로 따가운 눈초리를 받거나, 고향집에서 가문의 수치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차가운 현실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나온 독특한 관습이 바로 [습첩]이라는 것입니다.
말뜻 그대로를 풀이해보자면 "첩을 줍다"는 뜻인데, 실제로 이혼한 여인들이 새벽 동이 틀 무렵 서낭당에
나가 있으면, 그녀를 가정 먼저 본 성인 남자가 여인을 거두어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남자는 기혼이건 미혼이건, 양반이건 상관이 없었고,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를 꼭 따라가야만 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여성은 그 여성이 이혼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게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평생 소박데기라는 오명으로 따가운 눈초리를 받거나 고향집에서 가문의 수치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기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 소박맞은 여인은 친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정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소박은 남편이 아내를 내쫓아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의 재산을 전혀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친정에서의 생활비는 친정 아버지나 형제들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또한, 소박맞은 여인은 사회적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따라서, 친정에서도 소박맞은 여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으로 돌아간 소박맞은 여인은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소박은 여성을 매우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소박맞은 여성은 남편의 재산을 전혀 소유할 수 없게 되고, 사회적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따라서, 소박은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크게 위협하는 제도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소박을 금지하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소박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성들에게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