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충흔 전문가입니다.
덜 익은 바나나가 사과 곁에서 빠르게 숙성되는 과정은 에틸렌이라는 기체 상태의 식물 호르몬이 과일 내부의 대사 경로를 완전히 뒤바꾸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에틸렌 분자는 과일의 세포막에 위치한 수용체 단백질과 결합하여 숙성 신호를 전달합니다. 이 신호는 세포핵 내의 특정 유전자들을 깨워 숙성에 필요한 다양한 효소들을 합성하도록 유도합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저장 탄수화물인 전분이 단당류와 이당류로 분해되는 과정입니다.
과일이 채 익기 전에는 에너지를 전분이라는 거대한 다당류 형태로 저장하고 있어 맛이 쓰고 단단합니다. 하지만 에틸렌에 의해 활성화된 아밀라아제 효소는 이 긴 전분 사슬을 포도당이나 과당 같은 작은 당 분자들로 가수분해합니다. 이 생화학적 전환 덕분에 과일의 당도가 급격히 올라가며 우리가 아는 달콤한 맛이 완성됩니다.
동시에 에틸렌은 세포벽의 구조를 유지하는 다당류인 펙틴을 분해하는 펙티나아제와 폴리갈락투로나아제 같은 효소들도 활성화합니다. 이 효소들이 세포 사이를 단단하게 고정하던 펙틴 사슬을 끊어내면서 과일의 육질이 부드러워지게 됩니다. 엽록소를 파괴하는 효소 또한 활성화되어 바나나 껍질의 초록색이 사라지고 노란색 색소가 드러나는 시각적 변화도 동반됩니다.
사과는 다른 과일에 비해 에틸렌 가스를 매우 많이 방출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사과에서 뿜어져 나온 에틸렌 분자들이 바나나의 수용체에 닿으면, 바나나는 단순히 외부 신호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더 많은 에틸렌을 만들어내는 '자가 촉매적 에틸렌 생성' 단계에 진입합니다. 이로 인해 탄수화물을 당으로 바꾸는 효소 반응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며 바나나가 순식간에 익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