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가 해산되게한 105인 사건이라는 건 어떤 내용인가요?
일제강점기 시대에 항일 비밀결사단체이던
신민회가 105인사건에 의해서 해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105인 사건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인가요?
105인 사건이 어떤 일로 일어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일제가 저항적인 민족주의 및 기독교계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위하여 데라우치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최후로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이다. 신민회사건으로도 불린다. 일제는 군자금을 모집하다 검거된 안중근의 종제 안명근의 사건을 기회로 총독암살모의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의 간부·회원은 물론이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애국지사들을 일망타진하려 했다.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하고 122인을 기소, 105인을 유죄로 투옥했으나 고등법원에서의 치열한 투쟁으로 날조가 드러나 6명을 제외하고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5인 사건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가
신민회, 지식층 등의 항일세력에게 데라우치 암살 모의 누명을 씌우고 대거 체포하여
한국의 민족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05인 사건 1911 ~ 1913 - 우리역사넷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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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秘密結社) 조직이었던 신민회(新民會)를 뿌리 뽑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것일 뿐, 총독 암살계획은 근거가 없는 허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한민족 해방운동 탄압 목적으로 신민회의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모의로 날조해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체포한 사건으로 안명근 사건, 안악사건이라 하기도 합니다.
1910년 독립운동가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자금모집활동을 하던 중 자금을 내어주지 않던 부호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질책하고 이 사건으로 안명근은 밀고당해 일본제국 경찰에 잡히게 됩니다.
마침 황해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말살하고자 예의주시하던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을 당시 총독으로 새롭게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사건으로 확대 , 날조해 관련자 160여명을 잡아들이게 됩니다.
일제는 고문과 거짓 자백 강요 등을 통해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신민회회원과 평안도 주재 개신교인들을 지목해 애초 600명을 검거했으나 증거 불충분인 이들을 제외하고 128명을 기소,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가 총 105명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암살하려다 실패에 그친 사건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신민회를 뿌리 뽑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것일 뿐, 총독 암살계획은 근거가 없는 허위 날조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일제는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하였을까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구한국군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2개월간 6만여 명에 달하는 의병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습니다. 의병들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항일투쟁을 할 공간이 없음을 깨닫고 국외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한편, 일제는 의병세력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던 또 다른 한 축인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탄압하기 위해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신문지법·사립학교령·학회령·출판법·보안법 등을 제정하여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활동을 사실상 묶어 놓았습니다.
1910년 8월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국내의 모든 운동단체를 발본색원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작하여 황해도 일대 민족운동가 160여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안악사건(安岳事件, 일명 안명근사건)입니다. 또한 1911년 1월에는 양기탁 등의 보안법위반사건을 계기로 관련사료 서울의 민족운동가 다수를 체포함으로써 사실상 국내 항일운동세력 제거에 힘을 쏟았습니다. 따라서 국내에는 안창호 등이 비밀결사 형태로 조직한 신민회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한편, 경무총감부 경시이자 평양경찰서 서장이었던 쿠니토모 쇼캔은 이즈음 신민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신민회는 기독교와 평안도 지역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도 관련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신민회 세력을 완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는 미국 선교사까지 축출하기 위한 속셈도 함께 깔려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