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구식 군인과 도시 하층민은 정부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개항 후 일본으로 많은 쌀이 유출되어 쌀값이 폭등하자 도시 하층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더구나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던 구식 군인의 불만도 높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개월이나 밀렸던 급료가 겨와 모래가 섞인 쌀로 지급되자, 분노가 폭발한 구식 군인이 1882년 6월 임오군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을 비롯한 민씨 세력과의 갈등도 임오군란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