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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파리매77
활달한파리매7723.05.11

우리나라의 전국체전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뉴스를 보다 보니 문득 우리나라의 전국체전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 전국체전 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사항이 있었는지등 다양한 전국체전에 스토리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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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년 당시 조선체육회로 불리웠던 대한체육회가 창립 당시부터 시작되었던 종합대회이며 이 당시 조선총독부가 이전의 헌병경찰통치를 끝내고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들의 체육증진과 식민지가 되었던 조선의 화합과 단결을 하는 취지에 따라 전국 시도를 중심으로 체육대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국체전의 시초였다.

    그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회 전국체전은 1920년 경기도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개최되었고 이 당시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던 중소규모의 야구대회[3]였으며 종합경기대회로 전환된 것은 그 후로 5년 뒤 1925년부터였다. 여담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한반도 최초의 유료입장을 도입한 대회이기도 하다.[4] 또한 이때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가 1920년 11월 4일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개막식에서 시구를 했는데 이는 한국야구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구 기록이다.

    1934년에 가서야 조선체육회가 창설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때부터 축구, 테니스, 육상, 농구 등의 경기가 추가되면서 15회 대회부터는 전조선(全朝鮮) 종합경기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진화하였다. 그러나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 때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하고 사건 당사자인 동아일보가 정간조치를 당하게 되면서 1938년에는 결국 조선체육회도 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강제해산되었고 전국체전도 18회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부 스포츠 출신들이 강제 징병 및 징용을 당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올림픽도 2회 연속으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던 조선체육회가 부활하게 되면서 그 해 12월부터 제26회 전국체전을 통해서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이 대회부터는 남한의 지역단체 위주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에 열렸던 제28회 대회부터는 대한민국 정부 공인대회로 승인되기도 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전국체전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체육회가 주최하여 해마다 가을에 전국적 규모로 열리는 종합경기대회이다. 모든 국민에게 스포츠를 보급하고 스포츠 정신을 고취하여 국민의 체위를 향상시키며 지방체육의 저변확대를 도모하고, 명랑하고 질서있는 사회기풍을 조성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구호는 1970년 제51회 대회에서 채택한 ‘굳센 체력, 알찬 단결, 빛나는 전진’이다.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설된 후의 첫 행사로 그해 11월에 배재고보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기원으로 하여 이 대회부터 횟수를 기산(起算)해 왔다. 종합경기대회는 1925년에 등장하였으나 실질적인 종합대회의 효시는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여 야구·축구·테니스·육상·농구의 5개 경기가 열린 1934년 제15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이다.

    그후 1938년 일제에 의해 조선체육회가 강제로 해산되어 18회 대회 이후 중단되었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그해 11월 조선체육회가 재기하여 12월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대회를 10개 경기에 걸쳐 펼쳤는데 이 대회가 제26회 전국체육대회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정식명칭은 제27회 대회 때부터이고, 종전의 자유참가제를 시·도 대항제로 정착화한 것은 제29회 대회이다. 6·25전쟁으로 제31회 대회는 중지되었으나 1951년 제32회 대회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광주에서 개최되었다. 그후 서울과 지방의 균등한 체육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지방 순회개최를 실시하여 1957년 제38회 대회는 부산에서, 1960년 제41회 대회는 대전, 제44회 대회는 전주, 제45회 대회는 인천, 제46회 대회는 광주에서 각각 열려 지방체육의 제1도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되어 봉송되는 성화는 1955년 제36회 대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오늘날에는 전국을 일주하는 성화봉송 릴레이로 대회의 의의를 한껏 고조시킨다. 1970년 태능 국제수영장의 개장과 함께 제51회 대회부터 하계대회(수영·조정경기)를 추계대회로 통합하였고, 1972년 제53회 대회 때부터 규모의 방대화로 초등학교부와 중학교부를 따로 분리하여 전국소년체육대회를 실시하고 있다.

    광주에서 열린 제74회 대회는 역대체전의 최대치를 넘어서면서 체전의 비대화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자, 대전광역시가 개최한 제75회 대회부터는 구기종목을 중심으로 사전예선제를 실시하여 체전의 질을 높이면서 참가인원의 감축을 시도하였다.

    대회 운영방식은 남녀별·고등부·대학부·일반부로 나누어 27개 경기종목을 실시하여 각 시·도의 종합득점제로 순위를 정하여 종합 시상을 한다. 경기종목별로 l∼3위에게 시상을 하며, 개인 및 단체 경기의 l∼3위에게 금·은·동메달을 수여한다. 그밖에 모범선수단상·격려상·최우수선수상이 수여된다.

    제32회 대회부터 공식집계된 시·도별 종합우승에서 서울특별시 선수단이 26차례로 가장 많이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경기도 12차례, 경상북도 2차례, 전라남도 1차례이다. 제76회 대회는 지방자치제 시행의 영향을 받아 체전사상 처음으로 도청 소재지가 아닌 중소도시 포항에서 개최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1996년 제77회 대회 때는 체전 사상 처음으로 ‘달곰이’라는 마스코트가 선을 보였고, 문화·예술행사를 함께 실시함으로써 21세기 체전을 전국민의 체전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제78회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야간개회식을 실시하였으며 마스코트 ‘해오리’를 사용하였다. 제주도에서 열린 제79회 대회는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개최 1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로 정식 36종목, 시범 3종목에 2만 여 명의 국내 및 해외동포부가 참가하였으며, 1999년 제80회 대회는 인천광역시에서 열렸다.

    2000년 제81회 대회는 부산광역시, 부산광역시교육청, 부산광역시체육회 주관으로 정식 38종목과 시범 2종목에 선수 2만 명, 임원 5,000명이 참가하였다.

    제82회 대회는 2001년 10월 10일부터 16일까지 천안시를 비롯한 충청남도 일원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정식 38종목, 시범 2종목에 국내 및 해외동포부가 2만 1990명(선수 1만 7085명, 임원 4,905명)이 참가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1회 전국체전은 1920년 경기도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개최되었고 이 당시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던 중소규모의 야구대회[3]였으며 종합경기대회로 전환된 것은 그 후로 5년 뒤 1925년 이라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 전국체육대회는 1919년 3.1 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1920년 7월 13일에 조선체육회가 창설된 후의 첫 행사로서 11월에 배재고보운동장에서 거행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그 시작으로 본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