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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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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미와 경부는 어떤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드라마 야인시대를 보면


매우 잔혹한 형사로 나오던데요


실제로 일제시대 미와경부는 어떤사람이었나요?


매우 잔인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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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1884년 ~ ?)는 일본 제국 아이치현(愛知縣) 나카시마군(中島郡) 이나자와정(稻澤町) 나가노(長野) 출신의 고등계 경찰관이다.

    생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아이치현 메이린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기병대 제3연대에 입대하였고 동 제17연대로 전속되었다. 1905년 10월 제13사단 기병 제17연대 소속으로 한국 수비를 위해 조선으로 왔다. 1908년 경부에 임명되어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조사계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인 양심수들을 체포해 악명을 떨쳤다.

    양심수 사찰 업무에 두각을 나타내어 한용운, 이상재, 안창호, 박헌영, 의친왕 이강, 김두한, 나석주 등 좌, 우 성향을 막론하고 항일 성향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의 손에 거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염라대왕"이라는 별칭으로 악명이 높았다.[1]

    그는 조선에 있으면서 조선어가 유창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로 조선어장려시험 갑종 1등에 합격하고 경찰관 공로 휘장(警察官功勞徽章) 수상한 경력이 있다.

    1934년 충청남도 경찰부 고등과장, 1935년 원산경찰서장, 함경북도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1940년대부터 총독부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44년까지 등장하는데, 매일신보 1944년 3월 7일자에 의하면 종로총궐기위원회(鍾路總蹶起委員會) 특별위원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2]

    그의 사망 등 행적에 관련에서는 어린시절인 1920년대부터 악연을 맺었던 김두한에 의해 해방후 사망했다는 설, 해방후 일본으로 돌아가 1968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중 1968년 사망설에 대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확인해 본 결과 공식자료는 1944년까지 자료가 있으며, 그 이후의 자료는 현재 대한민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자료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3]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김영식, 2015, 호메로스) 45~47쪽 내용에 따르면, 미와는 1968년 정초에 연하장을 당시 동경 거주 김을한(1905 ~1992)에게 보낸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연하장 내용도 실려 있다). 김을한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 종로서 담당을 한 바가 있다. 연하장 내용에 따르면 미와는 1968년 당시 86세가 되었다. 일본인 형사 미와 와사부로가 사망하기 직전 한국독립군 사령관 백야 김좌진의 아들이(김두한) 대한민국 서울 1966년 구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에서 한국인의 국회오물투척난동이 일어났다는거 남한순경에 붙잡혀 서울형무소(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미와 와사부로가 1968년에 사망한 이후 김두한은 서울형무소(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었으나, 1972년 백야 김좌진의 아들(김두한)은 고혈압상태불명으로 운명(사망)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미와 와사부로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고등경찰관으로 당시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에게 악명을 떨친 인물입니다.

    사상범 사찰 업무에 두각을 나타내어 한용운, 이상재, 박헌영, 김구, 김좌진, 윤동주, 안창호, 의친왕 이강, 나석주, 신불출, 김원봉, 김상옥, 이봉창, 나철, 안중근, 방정환 등 신분, 성향, 직업, 나이 등에 상관없이 항일성향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의 손에 거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없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악명을 떨쳐 염라대왕이라는 별칭이있었고 그가 종로통에 나타나면 조선인들이 피해다녔다고 합니다.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능력이 탁월했고 고등경찰 방면에 정통하여 경찰 내에서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로경찰서 서장
    미와의 동생은 일본군 장교로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님의 군대에게 죽임을 당해 김좌진일가에 평생 원한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로 경찰서가 악명 높게 된것도 그자 덕택이고여
    광복후 김두한이 남산에 대리고 가서 생매장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 있으면서 조선어가 유창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로 조선어장려시험 갑종 1등에 합격하고 경찰관 공로 휘장(警察官功勞徽章) 수상한 경력이 있다.


    1934년 충청남도 경찰부 고등과장, 1935년 원산경찰서장, 함경북도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1940년대부터 총독부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44년까지 등장하는데, 매일신보 1944년 3월 7일자에 의하면 종로총궐기위원회(鍾路總蹶起委員會) 특별위원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