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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7.30

흥선대원군은 언제 실권을 뺏겼나요?

조선 후기의 권력자였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가지고있던 권력을 빼앗기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나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어떻게 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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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3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의 견제로 1873년 11월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출입하던 전용문은 폐쇄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에 은둔하였다가 인왕산, 수락산 등을 방문한 뒤 양주군 시둔면 곧은골 별장으로 칩거했다. 곧은골은 1914년 가능리, 후대의 가능동에 흡수되어 직동 부락이 되었습니다. 그의 실각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고 합니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민씨 집안은 권력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권력남용과 함께 부정 축재가 심하였고, 일가가 권력을 독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점점 대원군 섭정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반의어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대원군과 안동 김씨 김병학의 밀월 관계는 쉽게 잊어버리고, 대원군이 안동 김씨들에게 천대와 굴욕을 당하고 살았으며, 세도정치의 재발을 염려해서 가난하고 몰락한 집안 출신인 명성황후 민씨를 며느리로 간택했다는 이야기만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 조선 후기의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빼앗기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요인은 흥선대원군의 독단적인 통치 방식과 그로 인한 내부 갈등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중앙집권화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통치 방식과 개혁 정책은 일부 세력과 사회적 집단들에게 저항과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그의 개혁 정책은 기존의 권력 구조와 이해관계를 흔들었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강화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 일부 관료들과 사대부들은 이에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권력 확장을 제한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흥선대원군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내부 갈등과 반발은 결국 흥선대원군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그를 격리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흥선대원군과의 갈등을 이용한 세력들이 대권을 잡고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답변에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