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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12.19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역사적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백제의 멸망시기에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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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천궁녀'는 백제 의자왕의 궁녀 3,000명이라는 뜻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자결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설은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학적 표현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삼천궁녀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백제고기' 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부여 북쪽큰 바위에 후궁들이 모여 스스로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를 이끌고 떨어져 죽었다'라는 내용과 함께 바위이름을 '타사암( 정 )'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당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우리 역사서보다 더 많이 기록한 옆나라 대륙이나, 일본 역사서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록이 사실이라도 극히 소수였을 것이며, 낙화암의 규모나 백마강의 수심 및 지형을 보아도 대규모 집단 자살은 불가능합니다.

    고려 말 충신 이존오가 쓴 칠언고시에, 백제 멸망 및 타사암을 가리키는 시적표협으로 '낙화암'이 등장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조선 초 성종 때 문신 김흔은 '낙화암'이라는 시를 쓰며, 처음으로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썼어요. 또다른 성종 때 문신 조위도 '부여회고 차가정운'이라는 시를 쓰며 삼천궁녀'를 언급하였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조선 중기 중종 때 문신 민제인은 '백마강부'라는 시를 쓰며 '삼천궁녀'를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조선 성종 때를 거치며 타사암은 "닉화암'이 되었고, 중증 때를 거치며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기정 사실이 만들어졌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왕의 부패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역사가들은 3천 궁녀 이야기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백제의 국력으로 보았을 때, 3백 명 정도라면 모를까, 궁궐 안에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백제의 멸망을 더욱 애절하게 느끼게 하고, 의자왕이 여자들만 좋아하는 등 부패하고 타락하여 백제가 멸망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과장해서 지어 낸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천명은 그냥 비유표현 이란게 정설입니다.

    비슷한 예로 측천무후를 보고 납첩3천이라고 까는 기록도 있죠

    애초에 당시 백제 상황이 궁녀를 3천명이나 고용할 수준도 아니었고

    삼국사기에는 낙화암 관련 기록이 전혀 없고, 삼국유사에는 "궁녀들"이라고만 써져 있으니까요

    현재까지 남아있는 삼국시대 기록은 모조리 신라관점에서쓰여졌기 때문에

    의자왕에 관해서도 과장이 많았을 것이란 견해가 많아요

    일단 실존하는 아들임이 확실한 왕자만 9명이기 때문에

    정력이 대단하긴 했을 것이며 여기에 백제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사치부리다 망한거다 라는 "비유표현"을 위해서 3천궁녀라는 말이 "조선시대에"만들어진 것이란 것이 정설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정확한 3천명을 말하는 것이 아닌 문학적인 수사 입니다.

    삼천궁녀가 처음 언급된 것은 조선 초기로, 삼국사기에서는 낙화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유사에서도 단지 의자왕과 후궁들이 바위에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의자왕은 중국에서 사망했으므로 이 이야기는 잘 못되었고 일연이 언급한데서 등장하기만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에 의자왕을 아주 한심하고 여색에 빠져 허우적 댄 인물로 만들기 위해 지어진 이야기로 어떤 정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