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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자23.06.01

1920년대 국내 독립 운동 노선이 분열 되었는데, 그 배경과 결과가 궁금합니다.

1920년대는 6.10 만세운동 및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서 일제는 긴장하게 됩니다. 통치 노선도 친일파 양성하여, 민족을 이간질 시킵니다. 그래서 1920년대 국내 독립 운동 노선이 분열 되었는데, 그 배경과 결과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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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오동전투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1920년 6월4일 독립군 홍범도.최진동부대의 1개소대가 북간도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의 활발한 독립군 활동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매복시키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은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으며, 이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는데,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명 소좌 야스카와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득책이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촌락 후방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촌락으로 돌입할 때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하였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부대는 야마자키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부대가 고려령 서방에 도착하였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소수의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사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 십리를 뻗은 계곡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부대를 새로 재편성하였다. 1·2·3·4 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강상모 강시범 조권식을 정하였으며 별개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는 사령부부관으로, 이원은 연대부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으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홍범도장군이었다. 작전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고,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여, 일본군 주력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 중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서·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중대와 나카니시소대를 지휘하여 동쪽고지에 매복한 강상모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강상모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으로 패주하였다.

    봉오동 전투의 전과와 의의.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아군은 장교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로 독립군의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의 하나입니다.

    또 우리민족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승리 이기도 합니다.


    청산리 전투

    청산리전투는 좁은 개념으로 보면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칩입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를 크게 격파한 전투로 한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산리전투라 할 때에는 대한군정서는 물론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산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대한국민군·훈춘한민회·의민단·대한신민당 등)가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어랑촌·천수평·고동하 등 2, 3도구 서북편의 밀림장곡에서 전개한 대소 10여 회의 승첩을 통칭하여 의미한다.

    일제의 간도 침략군 가운데 청산리 일대에 침범한 동지대는 용정과 무산 방면에 진출하여 천보산에 주력을 두고 있었으며, 그 산전연대의 주력부대는 20일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사령관은 그들과 대전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한 골짜기마다 독립군을 전투편제로 이중 매복시켜 놓은 뒤 일본군을 현장으로 유인하였다. 독립군이 매복한 계곡은 청산리 골짜기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는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어 청산리계곡을 통과하려면 단 하나의 오솔길인 그 공지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안천소좌 인솔 하의 산전연대의 전위 부대는 독립군 매복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21일 아침 8시경 백운평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1시간 만인 상오 9시경에는 그 곳을 점령하다시피 하였다. 일본군이 최전선의 독립군 매복지점으로부터 불과 10여 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바싹 근접하였을 때, 김좌진 사령관의 공격 명령과 함께 600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군이 다다른 중앙의 공지를 일시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협공을 받은 안천 전위부대는 독립군의 공격에 대한 응전을 시도하였으나 매복장소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전열이 곧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독립군은 30여분 동안의 집중 공격으로 200여 명의 전위부대 전원을 섬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안천전위부대의 전멸에 뒤이어 백운평 방면으로 뒤따르던 산전 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산포 등의 중무기를 앞세우고 백운평 교전지를 향하여 돌격해 왔다. 그러나 주력부대 역시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공격에 수많은 사상자만 나오게 되자 보병과 기병으로 몇 개의 중대를 편성하고 독립군을 협공하기 위해 고지를 따라 돌격하면서 우회하였으나 절벽 위에서 사격하는 독립군의 화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부대를 약간 후퇴시켜 전열을 재정비한 뒤 산포와 기관총의 엄호하에 정면과 측면에서 최후의 돌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고지 위, 완전히 은폐된 지점에서의 이들을 향한 독립군의 집중사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전 본대는 끝내 백운평에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본영을 향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결국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완루구 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백운평 전투에 이어 10월 22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에서 동지대의 주력을 맞아 대승한 전투다.

    *천수평 전투

    백운평 전투를 치른 직후 밤새 행군을 재촉하였던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튿날(22일) 새벽 2시 30분경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에 이르렀을 때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의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에 다시 강행군을 재촉하여 연성대를 앞세우고 1시간 가량을 행군한 끝에 천수평에 당도하였다. 이 곳에는 일본군 1개 중대 120여 명의 기병이 독립군이 접근해 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독립군은 이들을 완전히 포위한 채 5시 30분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깊은 수면 중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대기만 하다가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사하였다. 이에 비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17명에 불과했다.

    *어랑촌 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전투가 어랑촌 전투이다. 어랑촌은 1910년 국망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의 주민이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골짜기 안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인데 이 마을을 중심으로 10월 22일 아침부터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5,000여 명간의 격전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모든 면에서 월등히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항일의지로 무장한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뛰어난 전술로 이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 전투의 전과와 의의

    청산리전투의 총체적인 전과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군 전사자는 연대장 1명·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1,254명, 부상자는 200여 명, 독립군측은 전사 1명·부상 2명·포로 2명이라고 합니다.

    독립군은 우선 정신적 측면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굶주림을 견딜 뿐만 아니라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항전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전술적 측면에서 볼 때 독립군이 사격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여 일본군에게 정확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일본군은 삼림과 계곡 등의 지형과 지세를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지상전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은 지휘관의 작전 수립·지휘 능력면에서 일본군을 능가했습니다.

    그 동안 독립군을 양성해 온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국내진입작전이 개시된 1919년 여름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군의 항전에 뒷바라지를 해 왔습니다. 대개가 개척농민으로 형성된 한인사회는 아직 경제적으로 생활기반조차 확고하지 못한 형편에서 군자금을 내어 무기와 여러 가지 군수물자를 마련케 하였고, 독립군의 식량·피복 등을 전담하다시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일제 토벌군의 동태를 광범하고 정확하게 탐지하는 정보활동은 물론 독립군의 각종 통신연락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 독립군의 행군이나 전투시에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그전투에 참패한 보복으로 만주 전역의 우리 동포에게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기 시작, 여러곳의 우리나라 간도동포 참살 사건 등을 빚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