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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파리매77
활달한파리매7723.05.10

조선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은 무엇이며,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조선시대에도 대표하는 다양한 문학작품들이 등장했으리라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무엇이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알려진 계기 및 특징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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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0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15세기 세종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것은 한국문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한글의 등장과 함께 모든 글쓰기 활동이 한문과 국문 글쓰기로 분화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한문이 공적(公的)인 글쓰기 영역을 담당한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한문 중심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시조, 가사, 국문소설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국문문학 양식을 창안하여 발전시키게 된다. 한국문학은 한글이 창제로 말미암아 비로소 온전한 문학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국문시가 양식으로는 시조(時調)를 손꼽을 수 있다. 시조는 그 시적 형식이 고려 후기에 성립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은 성리학(性理學)을 기반으로 더욱 융성한다. 시조는 음악과 결부되어 창(唱)으로 노래한다. 시조의 시적 형식은 초장, 중장, 종이라는 3장으로 구성되는 3행시 형식의 단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조는 각 장이 3~4음절로 된 싯구가 4구씩 이어지면서 4음보격의 일정한 리듬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형식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시적 정서의 표현과 그 미적인 완결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시조는 사대부층은 물론 서민층까지도 널리 애호하는 문학 형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사설시조(辭說時調)가 발전되어 평민들의 꾸밈없는 감정을 소박하게 형상화하는 그릇이 되었다. 사설시조는 일반적인 평시조의 3장 형식에서 중장 또는 종장이 정제된 4구의 형식을 벗어나 장형화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절제된 형식을 파괴하고 있는 셈인데, 자유분방한 시 형식에 서민층의 삶의 애환, 현실에 대한 풍자와 해학 등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사회의 한문학은 주자학의 이념을 강조하는 효용적 관점이 주류를 이루면서 시와 문장에서도 도학적 경향이 널리 자리잡는다.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한문소설의 효시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한문 서사 가운데 몽유록(夢遊錄)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꿈이라는 환상적인 비전을 통해 새로이 해석하고 있는 우화적(寓話的) 양식이며, ‘전(傳)’은 개인의 생애를 평설을 곁들여 약술하는 단편 서사이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박지원(朴趾源)의 한문소설은 전통사회의 모순된 삶의 구조를 풍자 비판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전환기적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한문단편(漢文短篇)'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독특한 서사 양식이 등장한다. 한문단편은 시정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으로, 조선 후기 사회상의 변화를 다양한 시각에서 소박하게 그려놓고 있다. 조선시대 한시는 교훈적인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현실주의적 상상력에 근거하여 서민들의 생활과 정서를 폭넓게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중인 계층의 지식인들에 의해 창작된 이른바 ‘위항문학(委巷文學)’ 이 한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담당하게 된다. 조선시대 한문학은 개화계몽시대 국어국문운동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영역이 축소되고 문화적 기능도 점차 소멸된다. 한문 자체가 중국의 글이라는 점,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 양반 사대부층이 독점해온 폐쇄적인 계급문화를 만들어 왔다는 점 등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문학이 소멸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해당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시대의 문학 [朝鮮時代-文學]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있습니다.

    관동별곡은 작자가 45세 되는 해 정월에 강원도관찰사의 직함을 받고 원주에 부임하여 3월에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는 가운데 뛰어난 경치와 그에 따른 감흥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율격은 가사의 전형적인 4음 4보격을 주축으로 하며 구체적인 음절수의 양상을 보면 3.4조가 압도적이고 그 다음이 4.4조이며 그 밖에 2.4조 4.3조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진술양식에서 작자가 독자에게 직접 말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인 신선과 대화를 보여주기도 하며 감탄사와 생략법, 대구법을 적절히 사용해 우리말을 시적으로 사용하는 뛰어난 문장력이 나타납니다.

    후인들은 이 작품을 매우 칭찬해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동방의 이소라고 찬양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체로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 신분제도, 일부다처제, 조선시대 생활상 등이 그 특징이 되겠군요. 조선시대 문학작품으로는 박지원의 <허생전> <호질> <양반전>, 허균의 <홍길동전> 등이 있습니다.


    * 조선시대 문학

    전기
    1443년(세종 25) 훈민정음 창제로 본격적인 한글문학이 시작되었다. 그 성과로 한국 최초의 정음문학(正音文學)인 《용비어천가(1445)》 《월인천강지곡(1448)》 등이 탄생되었다. 한편 새 왕조를 칭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장(樂章)으로는 정도전(鄭道傳)의 《문덕곡(文德曲)》 《무덕곡(武德曲)》이 기본을 이룬다. 경기체가는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경우처럼 악장의 구실을 하다가 형식이 산만해지면서 조선 전기에 사라졌다. 가사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 이후 사대부문학으로 자리잡았고 유배가사·기행가사 등으로 다채롭게 발전하였다. 송순(宋純)의 《면앙정가》를 거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에 이르러 가사문학의 절정을 이루었다. 시조는 고려 유신(遺臣)의 유교적 충절을 읊은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 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의 《회고가(懷古歌)》에 이어 새 왕조의 건설을 찬양한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외적을 물리치면서 강토를 개척하는 진취적 기상을 표현한 김종서(金宗瑞)의 《전진가(戰陣歌)》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충의가(忠義歌)》 등이 나왔다. 그 뒤 이현보(李賢輔)·송순(宋純)을 중심으로 가단(歌壇)이 형성되었고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등 연시조의 성행을 거쳐 정철은 《훈민가(訓民歌)》 등을 통하여 시조의 판도를 넓혔다. 황진이(黃眞伊)·이매창(李梅窓) 등은 애틋한 감정으로 애정을 노래하여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한문학에서는 세종의 집현전 설치가 그 융성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서거정(徐居正)이 《동문선(東文選)》 《동인시화(東人詩話)》, 어숙권(魚叔權)이 《패관잡기》를 기술하였다. 특히 《동문선》은 한국의 문화적 유산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역대 시문 중에서 뛰어난 것만 뽑아 모은 것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를 지어 사장파(詞章派) 문학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이달(李達)·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 등의 삼당시인(三唐詩人)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재능을 발휘하였다. 고려 때부터 이어진 가전(假傳)은 사물이 아닌 심성을 의인화하는 것으로 변모하였으며, 김우옹의 《천군전(天君傳)》과 임제(林悌)의 《수성지(愁城誌)》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 전기에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이 비속한 설화에도 관심을 가져 음담패설을 한문으로 옮긴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강희맹(姜希孟)의 《촌담해이》, 송세림의 《어면순(禦眠楯)》 같은 골계류가 편찬되었다. 명혼설화(冥婚設話)와 몽유설화(夢遊設話)를 수용한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설화를 소설형식으로 끌어올려 고유신앙과 연결된 생활감정과 역사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를 통하여 구전에만 의존하던 《동동》 《정읍사》 등의 옛 노래를 비로소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정착시켰다.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문학의 관심은 현실비판으로 돌려졌고, 지배층의 무력함을 절감한 평민들의 자각이 반영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 양반 중심적인 문예활동을 비판하면서, 일반 서민들이 창작하여 향유하는 평민문학이 나타났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 박인로(朴仁老)의 《태평사(太平詞)》 《선상탄》,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은 임진왜란 때의 수난과 분발을 수록한 것이고, 병자호란의 참상을 그린 기록으로 궁녀가 쓴 《산성일기(山城日記)》, 김상헌(金尙憲)과 삼학사의 시조가 있다. 이 시기 시조문학의 최고봉은 윤선도(尹善道)였다. 그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산중신곡(山中新曲)》은 자연시인으로서의 풍모를 뚜렷이 드러내는 것으로, 시조문학의 가치를 한층 더 높였다. 그 뒤 중인·서리·시정인 등의 평민 작가들이 그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시조를 통해 사대부들과 경쟁하면서 가단(歌壇)을 이루어 시조창과 창작을 수련하고 시조집을 편찬하였다. 특히 이들에 의하여 사설시조(辭設時調)가 만들어진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 1728)》,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 1763)》, 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歌曲源流, 1876)》가 시조문학의 자리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문학에 있어서는 박지원(朴指源)·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가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려 생동하는 문체를 이룩하였고, 신위(申緯)는 개성적인 표현으로 한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중인·서리·시정인들도 한문학 창작에 적극 참여하여 위항문학(委巷文學)이 성립하였다. 또한 문학의 본질과 사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나타나면서 문학사상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허균은 도학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감정을 담은 문학을 주장하였고, 김만중(金萬重)은 모방에 급급한 한시보다 민요가 더욱 가치 있다는 견해를 드러내었으며, 홍만종(洪萬宗)은 역대 시가를 모아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해 국문시가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였고 이세보(李世輔)는 458수의 작품으로 개인시조집을 엮었다. 경기체가가 자취를 감춘 대신 가사가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길이가 길어지고 형식이 산만해지는 한편,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소재가 확대되었다. 기행가사는 일본과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 온 인물들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1763)》,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 1866)》 등 장편가사가 나왔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우부가(愚夫歌)》 같은 풍속가사도 성행하였다. 가톨릭 포교를 목적으로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辭), 여자들의 규방가사(閨房歌辭) 등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역사적 내용을 지닌 인물 전설인 야담에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靑丘野談)》, 이희준(李蓍準)의 《계서야담(溪西野談)》, 이원명(李源命)의 《동야휘집(東野彙輯)》 등이 있다. 조선 후기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고대소설의 개화이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로 시작된 한문소설에서는 허균의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蔣生傳)》, 실화(實話)를 다룬 이항복(李恒福)의 《유연전(柳淵傳)》과 권필의 《주생전(周生傳)》을 비롯 심성을 의인화한 정태제(鄭泰齋)의 《천군연의(天君演義)》 같은 가전소설도 나타났다.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등 10여 편의 단편소설들은 모두 한국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이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 부녀들 사이에서 내간·제문·일기·실기 등을 한글로 짓는 풍속이 정착되었으며, 이와 같은 배경에서 《산성일기》,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 궁중 실기류가 지어졌다. 한글소설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시작으로 남해 유배 시절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이나 임금을 참회시키기 위하여 지었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에 이르러 한층 세련된 표현을 지니게 되었다. 군담류(軍談類) 소설로는 《조웅전(趙雄傳)》 《유충렬전(劉忠裂傳)》 《임경업전(林慶業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장인걸전(張人傑傳)》 《곽재우전(郭再祐傳)》 《여장군전(女將軍傳)》 등이 있으며, 염정소설로는 《춘향전》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옥단춘천(玉丹春傳)》 《운영전(雲英傳)》 《이진사전(李進士傳)》 등이 있다. 이 밖에 《장화홍련전》같은 가정소설, 《심청전(沈淸傳)》같은 도덕소설 등도 출간되었다. 18세기 이래 판소리가 등장하면서 서민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판소리는 본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고종 때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수궁가》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다듬어졌다. - <파스칼 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권태형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유명작품으로는 면앙정가가 있으며 자연 속에서 홍진의 일은 잊고 지내는 내용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문학작품으로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은 하층민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 사회 현실의 문제를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형상화

    하였다.


  • 안녕하세요. 정광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대표문학이 라면 조선의 대표문학은 가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대표적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정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한글이 창제됨으로 다양한 문학 작품이 발달할 수 있었는데요.

    조선 전기 가사문학: 자유형의 시가. (귀족적임)

    예시: 상춘곡. 면앙정가 등.


    조선 후기: 평민들 사이에도 확산. 시조 작가의 수가 늘어남. 가사문학에 정철, 박인로 등의 대가가 인기를 끔.

    박인로의 작품: 태평사. 선상탄

    후기에는 판소리도 유명해짐: 심청가. 흥부가. 토끼타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