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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3.30

'정여립의 난'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정여립의 난은 무엇인지, 어떠한 배경으로 일어난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누가 주도하여 일어났으며 결과는 어떠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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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선조 22년(1589)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 군수 이축, 재령군 군수 박충간의

    연명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가 병조판서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는 등의 혼란을 야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나무위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여립의 난 > 조선 선조 22년 (1589) 일어난 기축옥사의 시발점 입니다.

    발단은 선조 22년(1589) 황해도 관찰 한준, 안악군 군수 이축, 재령군 군수 박충간의 연명 상소로 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이들은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가 병조한테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줄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는 등의 혼란을 야기하며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다만 지방관청의 시선과 중안정주의 시선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정여립의 난에 대한 해석과 판단이 어려운 이유는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물 사실과 다은 내용으로 기록하거나, 저술가의 주관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경우가 많이 때문 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교차검증을 통해 어디까지 실제 사실과 부합한지, 어떤 사람의 어떤 입장과 관점이 반영된 정보인지 조심스럽게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정여립의 난은 1446년에 일어난 조선시대의 사건으로, 정여립이 일으킨 반란입니다. 이 사건은 정조의 시조인 세조 때의 사건으로, 세조가 실권을 쥐고 남녀노소가 다스리는 효도정치를 시작한 뒤에 일어난 반란입니다.

    정여립은 당시 세조의 사위로, 왕위에 올라 약혼한 공주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이를 눈치채고 정여립을 옥살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정여립의 지지자들은 난을 일으켰습니다.

    정여립의 난은 3년간 이어졌으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난에서 승리한 세조는 일부 지역에서 강력한 탄압과 참수를 가하였습니다. 또한 이 난 이후에 세조는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처리하면서 권력을 확고하게 잡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정여립의 난은 세조가 왕위를 안정시키고 조선시대의 정치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천하에는 일정한 주인이 없으며, 누구라도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던 혁신사상가 정여립이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정철은 서인에 속한 사람으로,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이발, 이호 등 동인을 대거 처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하며 이를 통해 정철과 서인이 붕당 정치의 첫 번째 승자로 떠올랐다.

    정여립이 대동계(大同契)를 이끌고 반란을 꾀한다는 역모고변으로 옥사(獄事)가 시작되었다.[7] 정여립의 자결로 역모는 사실로 굳어졌고,[7]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재탈환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서인들은 사건을 확대시켜 3년간이나 옥사(獄事)를 이어가며 1,000여명의 동인들을 유배나 사형에 처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여립 난은 1811년부터 1812년까지 조선시대에 일어난 농민혁명입니다. 이 난은 농민들이 조세 부담이 심각해져 농지를 못 놓고 기아와 노역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농민들은 일부 지배층 제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전국적으로 번지며 대규모 농민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이 난은 처음에는 농민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반란으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지배층의 대규모 강탈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악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서 반란은 결국 종식되었고, 난이 일어난 지역은 피폐해졌습니다.


    정여립 난의 결말은 농민들의 패배와 지배층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후에는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정조와 순조 시대에는 농지조사가 실시되고, 광해군 때에는 농민들을 위한 국책 사업과 농업 기술 개발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 난으로부터 지배층들은 많은 교훈을 얻어 천주교와 같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여 농민들을 가둘 수 있는 심리적 수단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단은 선조 22년(1589)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 군수 이축, 재령군 군수 박충간의 연명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여립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가 병조판서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는 등의 혼란을 야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놀란 선조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대책 회의를 하였다. 당시에는 동인들이 집권 중이었고, 정여립은 동인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언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동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안악군의 조구가 자신의 계획을 고변한 사실을 금구에서 변숭복에게서 전해들었다. 그 후 변숭복 및 아들 정옥남과 함께 자신이 서실을 차리고 대동계(大同契)를 운영했던 죽도(竹島)[3]로 도주했다. 그러나 진안 현감이 토벌대를 조직해 추격하자 변숭복과 정옥남을 살해한 후 자신도 칼을 거꾸로 세운 다음 자살했다. 이후 동인들의 입지는 축소되어 버렸는데, 그의 자살은 반역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