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애니메이션으로만 접했던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광주 시내에서 일본 학생의 한국 여학생 희롱사건이 발단이 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짧은 애니메이션으로만 접했던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5 · 18광주민주화운동은 1950년 6 · 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었으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 지식인 중심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집권세력에 대항해 최초로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 저항 운동의 수준과 한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뚜렷한 지도부와 이념적 프로그램이 결여된 상태에서 일어난 비조직적 군중의 자연발생적인 자구행위였으며, 방어적이고 대중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1970년대식 반독재시민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 항쟁의 주체들은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진압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이전의 친미적인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1988년 여름 대한민국 국회에 설치된 5 · 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가 윌리엄 글라이스턴 당시 주한미국대사와 전 한미연합사령관 존 위컴 장군의 증언을 요구하자 미 국무부는 그들의 증언을 거부하는 대신 광주특위의 서면 질문에 국무부가 동의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 결과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미국정부의 성명서」가 1989년 6월 19일에 작성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당시 한국 당국은 1980년 5월 18일 0시 1분에 시작된 전국계엄령 선포를 불과 2시간 여 앞둔 전날 21시 30분 경에 미국에 통보하였으며, 광주의 관영 라디오 방송이 한국 특전사의 광주파견에 대해 미국이 승인하였다고 방송했지만 이는 거짓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 계엄사가 광주에 동원한 특전사나 20사단은 광주 투입 당시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광주에 동원된 것을 사전에 알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광주에서 행한 것에 대하여 미국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판단했으므로 특전사의 작전에 대한 사전 승인에 대하여 강력하게 부인하였던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압력이 꼭 법적인 근거에 의해서만 행해지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광주사건을 방조하고 사후 승인한 책임을 면하기 위한 성명으로 볼 수도 있다.
글라이스틴 등은 당시 전두환 장군을 방문하여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하면서 종용과 설득, 압력이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미국은 극히 미미한 영향밖에 미칠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더 이상 혼란에 빠져 반미적인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군인들의 진압행위를 결과적으로는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단기적으로는 광주에서의 특전사를 20사단으로 대체하는데 마지못해 동의하는 등 병력의 출동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한 압력을 행사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1년 전에 김대중을 만난 사실이 있었던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그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미국은 김대중이 체포된 다음 날인 1980년 5월 18일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미국 대사관은 미국 관리가 김대중의 재판에 방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이를 불쾌하게 여겼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재판 후 김대중에 대한 기소내용은 억지(far-fetched)라고 발표하였고,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뒤 레이건 정부가 출범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의 감형과 자신의 방미를 연계시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18광주민주화운동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하여 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다.[40]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혀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이 내란과 폭동을 저지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처음에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폭동, 당시 매스컴에서는 광주사태 또는 광주소요사태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점차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적고 있다.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한 사건으로, 지만원을 위시한 극우파에서는 전두환의 주장을 답습하여 무장 폭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여러 차례 그러한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확인했고,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해석한다. 헌법재판소는 저항권 행사에 대해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 당시 "개별 헌법조항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 아닌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전체적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이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고, 이미 유효한 구제수단이 남아 있지 않아야"하며, 그 경우에도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 회복"을 목표로 해야만 정당성을 지닌다고 판시한 바 있는데(2013헌다1) 이때 광주의 사례가 여기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헌재의 해석상 저항권은 그 특성상 예외적인 폭력의 사용이 불가피하므로(그렇기 때문에 헌재는 저항권의 행사에 대해 상기와 같은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고) 시민군의 무장과 항쟁을 가리켜 위법적 또는 위헌적이라고 주장하는 무장 폭동설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양측 모두에게 근거없는 주장임이 확인된 것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41]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계엄군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폭동적 시위진압 방식을 고수하였고,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력 등의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불법처형을 하고 민간인을 향해 총기까지 사용하면서까지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 대항했지만 신군부에게 철저히 진압됐다. 덕분에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의 여파가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다시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9년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항일 기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그러던 1929년 3월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 등이 교규 문란의 이유로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이 사건으로 교내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며 긴장이 계속되다가 광주학생동맹휴교 1주년이 되는 6월 26일 5학년을 비롯하여 2·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일학생간의 대립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 폭발하였다고 합니다. 이날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朴己玉).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고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인 박준채(朴準埰)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 파출소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하였다.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최희선(崔熙善).김보섭(金普燮) 등 10여 명이 박준채와 합세하여 한·일학생간의 대결이 계속되었으나 더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11월 1일의 광주역사건으로 사태는 급전되었다고 합니다. 당일 통학생도 아닌 일본인 중학 5학년 학생 4, 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정세면(鄭世勉)에게 도전해 옴으로써 한·일학생간의 충돌 사건이 다시 일어났는데 양교의 교사들이 충돌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현장에 왔으나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은 중학생들을 오히려 선동하였으며, 교사끼리의 교섭도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의 교만한 방언으로 옥신각신하다가 간신히 동시 퇴각을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 5학년 학생 노병주(盧秉柱)와 통학생 단장 채규호(蔡奎鎬) 등이 사실을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묘안 없이 귀가하였고 11월 2일 하학 열차에는 양교 교사와 경찰이 동행하였으며, 아침에는 전라남도 지사가 양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감독을 지시했으나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형식적이며 관료적 차원에서의 수습책이 광주 학생들의 굳은 민족 의식에 기조를 둔 대일항쟁정신을 퇴화시키거나 변질시킬 수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