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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임
질문자임23.01.08

조선시대 교육정책에 대해 알려주세여

조선 후기에 가면 관학보다 사학이 더 유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이 교육정책을 펼친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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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원제로 인구비례로 학생수를 뽑았습니다.

    전국 1만 5천명으로 하고 역외생도 많았다고 합니다 성균관 잡학 향교4부학당 종학 이라는 사학이 아닌 관학이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양반자제 중심 운영


    ① 인문교육과 직업기술을 발전시켰지만, 문관양성을 위한 유학만 중시


    ---> 기술적인 잡학은 천시, 무관의 교육시설은 거의 전무


    ② 관학보다 사학이 교육을 주도


    : 양반들은 평민들과 함께 향교에서 공부하려 하지 않고 사학이나 자기 집에서 특권적으로 공부하려 하였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지배층인 양반의 요구에 못 이겨 학교제와 과거제도를 곧바로 연결하여 운영해 나갈 수 없었다.


    * 주로 지방양반과 향리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단 향교에는 양인의 입학이 허용되었는데,


    이것은 유교적 교화에 근본 취지가 있는 것으로 과거와의 연결은 희박하였다.



    (2) 관학의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였다.



    (3) 정원제, 인구비례로 학생 수를 조정


    ---> 경국대전에 의하면 부, 대도호부, 목은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으로 하였다.


    전국 교생의 정원은 1만 5천명이며 그 밖에 액외생(額外生)이라 불리는 정원 이외의 교생도 상당히 많았다.



    (4) 인문교육은 사농일치가 원칙(공장과 상인은 제외)


    : 교생은 농한기에 기숙사(齋)에 기거하면서 유학, 경전을 배우고 농번기에는 방학을 맞아 농사를 돌보았다.


    1년에 2번 시험을 치러 우등자는 생원, 진사 시험의 초시를 면제해 주고 성적 미달의 낙강생은 군역을 지도록 했다.



    (5) 향교의 교생은 출신신분에 따라 상액(上額), 중액(中額), 하액(下額)으로 구분


    ---> 상액은 청금록(靑衿錄), 부거안(赴擧案)에 수록되고, 중액과 하액은 교생안(校生案)에 수록된 사람들이었다. 청금록에 등재되는 동재유생은 현족 중에서 경전시험을 보아서 3하 이상의 성적을 받은 자에 한하여 뽑았다. 다만 향안은 내외 현족의 여부만을 따지는 데 반하여 청금록은 현족 중에서도 유교지식의 유무를 필수조건으로 하고, 장차 과거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으므로 청금록이 향안보다 어느 의미에서 더욱 중요하였다. 그 결과 양반들이 교육을 받을 생각도 없으면서 굳이 향교 청금록에 등록하고자 한 것은 향교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 할 수 없게 한 규정과 확고한 지방양반의 지위를 인정받아 향촌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동재유생은 정원이 없었다. 따라서 청금록은 향안과 함께 양반작격을 보증받는 중요한 문적이 되었다.




    2. 교육기관


    (1) 종류


    ① 관학 : 성균관, 4부 학당, 종학, 잡학, 향교


    ② 사학 : 서재(書齋), 서당(書堂), 가숙(家塾), 서원(書院)



    (2) 인문 교육


    ① 서당 (사립초등교육기관) : 훈도(訓導), 접장(接長)


    ② 4부 학당(중앙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


    : 교수, 훈도가 지도, 소학과 4서 중심


    --- 문묘가 없으며, 각 학당마다 정원은 100명 이었다. 성균관의 진학시험인 승보시가 있었다.


    * 東, 西, 南, 北, 中의 5부 학당은 국초부터 있었는데, 세종 27년에 북부학당을 폐지하여 4부학당의 제도를 확립하였다.



    ③ 향교(지방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


    : 교수, 훈도, 교도, 학장의 지도로 소학과 4서, 5경의 유교경전을 배웠다 -


    -- 대성전(문묘), 동 ∙ 서 무, 명륜당, 동 ∙ 서재로 구성되었으며, 지방양반과 향리의 자제들을 교육하여 양인의


    입학도 허용하였다. 정원은 인구 비례이고 부(90명), 목(90명), 군(50명), 현(30명)에 각 1교를 두었다


    -- 향교와 부학을 나온 학생들은 문과, 무과, 잡과의 과거를 거쳐 관리가 되고, 더러는 직접 서리로 나가기도 했다.



    ④ 성균관(고급관리를 양성하는 9년제 국립대학) - 200명에서 100명으로 감소


    - 교수 : 대사성(총장), 사성, 사예, 직강, 박사


    - 입학자격 : 소과합격자, 4학 생도, 하급관리, 공신 ∙ 훈신의 자제 중 선발된 자


    - 건물 구성 : 명륜당 - 유학을 강의하는 곳


    문묘 - 공자를 모신 곳


    동서양재 - 유학생들 기숙사


    동무, 서무 - 선현제사


    비천당 : 과거시험을 보는 곳


    존경각 : 도서관



    ㉠ 기능 : 유교이념을 지키는 기능, 고급 문관관료를 양성하는 교육적 기능


    ㉡ 학생 : 모두 재에 기숙하고 알성시 특혜와 국정에 訴하는 권당권을 부여하였으며, 우등생은 직접 문과 복시(2차 시험) 에 나가고, 50세까지 착실히 공부한 사람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벼슬을 주었다.


    ㉢ 교육 : 경국대전, 동국통감, 4서 5경, 근사록, 성리대전, 통감, 좌전, 송원절요 등 과거 시험과목을 주로 공부하였다.


    ㉣ 문묘 : 문묘는 공자 즉 문선왕을 향사하는 사당이다. 그러나 문묘에는 공자 외에도 이른바 10철, 72현 등 공자의 여러 제자들 및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유현들을 배향하였다. 문묘에 종사된 명현은 모두 133인이다. 그 중에서도 주희를 비롯한 송유(宋儒)들을 많이 종사하고 있다. 이 중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이황, 이인후, 이이, 헝혼, 김장생, 김집, 조헌,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 18인이 한국의 유현(儒賢)이다.



    (3) 기술교육 (잡학)


    ① 잡학(8학) : 중앙(285명)과 지방(약 6천명)의 해당 관청


    ---> 주로 중인, 평민, 일부 고관 자제


    ㉠ 역학(외국어) : 사역원 - 한학(漢學 : 중국어), 몽학(蒙學 : 몽고어), 여진학, 왜학


    ㉡ 의학 : 전의감, 혜민서 - 각 군현에 의학을 담당하는 심약 1~3인 씩을 둠


    ㉢ 음양학(천문, 지리, 명과<命科:점복>) : 관상감


    ㉣ 산학 : 호조 - 산학교수, 산학훈도를 두어 주관


    ㉤ 율학 : 형조의 고율사(考律司) - 각 군현마다 율학을 담당하는 검율(檢律) 1인 씩을 두었다.


    ㉥ 기타 : 圖學 - 도화원, 道學 - 소격서, 악학 : 장악원(掌樂院)



    ② 의학, 율학, 역학의 3학


    : 지방에서도 교육 - 의학과 율학은 모두 군현에서 가르치고, 외국어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한학과 여진학은 주로 평안도에서, 왜학은 경상도 삼포에서 각각 가르쳤다.


    그러나 지방의 의학과 율학은 부진하였다.



    ③ 조선시대 잡학에 대한 교육정책


    : 유학 중심이었고 잡학 교육은 부차적이었다.


    그러나 잡학교육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고 끊임없이 장려되었다.



    ④ 양반자제들은 잡학 생도가 되는 것을 기피한 배경


    ㉠ 유교의 기술직 천시 관념 때문에 (사농공상)


    ㉡ 조선 초기 지배신분의 분화현상 때문에


    ---> 문무양반체제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기술직은 관념적, 제도적 차별대우를 받게 되어


    기술관은 체아직만 받고 직전은 받지 못하였다.



    * 고려시대에는 기술관에 대한 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기술관에게는 녹봉은 물론 전시과의 제15과부터 제16과가 지급되었다.


    양반자제들도 잡과시험을 통하여 기술관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양반자제들을 기술관에 입속 시키는 것은 조선 건국 초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난 15세기 후반기부터 차별을 받기 시작하였다. 기술관은 6개월이나 3개월마다 다시 임용시험을 거쳐야 하는


    체아직을 받았으나, 직전법이 실시되면서부터 직전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아가 기술직을 맡으면 양반과의 통혼 길도 막혔다.



    * 고려 말 사대부세력의 성장과 더불어 기술직에 대한 차별의식이 심해지고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잡학과 기술직에 대한


    관념적, 법제적 차별로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자제들은 잡학 생도가 되는 것을 싫어했다.



    * 평민의 자제들이 주로 잡학을 배웠으나 의학과 역학은 양반 자제들도 많이 배웠다. 조선 초기에는 다른 시기와 비교하여


    잡학이 비교적 존중되고, 잡학을 한 사람 중에서도 고관이 많이 배출되었다.



    ⑤ 잡학의 생도


    : 조선 초기만 해도 양인 자제뿐 아니라 양반 자제들도 잡학에 입속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양반 자제들이 잡학 생도가 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 따라서 주로 양반의 자기도태 계층(서얼, 문무관 2품 이상의 첩자손)이나 향리나


    일반 양인계층이 잡학생도나 기술관으로 입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