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헌강왕 때 처용무가 유행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신라 헌강왕 때 처용무가 엄청나게 유행했고
그 결과 신라는 사치와 환락에 젖었다고 평가하던데
처용무와 사치, 환락이 어떤 관련성이 있나요?
처용무라는 것은 본래 악귀를 쫓고 복을 기원하는 춤이 아니었나요? 처용무가 사치, 환락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그리고 헌강왕 시기에 처용무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용무란 동서남북과 중앙에 6방에서 5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 궁중 무용을 일컫는데 때문에 오방처용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한국의 궁중 무용으로는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탈을 쓰고 춤을 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하지요. 통일신라 말기 헌강왕이 행차하여 한반도 남동쪽 울산시 인근 개운포에 이르렀는데 왕이 환궁 채비를 하였을 때 짙은 운무가 낀 하늘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일관이이는 동해의 용이 부리는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이를 풀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지요 이에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자 먹구름이 걷히고 동해 위로 용이 일곱 아들을 거두고 솟아올라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 중 처용이라는 이름의 한 아들이 건강 왕을 따라 수도인 경주로 와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관직을 얻어 머물렀는데 어느날 밤 처용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려 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에 처용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무릎을 꿇고 앉아 사과하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악기를 몰아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맞아 드리게 되었다고 하며 악학궤범에 의하면 음력 섣달그믐날, 묵은 해의 역신과 사비를 쫓기 위해 행하는 나례 의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것입니다 처용무는 사치나 환락과는 연관성이 없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