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화백회의에 신라왕이 참석하지않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화백회의는 귀족들의 뜻을 조렴해서 왕에게 그 결론을 보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있지만 신라 초기에는 이러한 화백회의에 왕이 직접 참석해서 이러한 의미와는 상반되는 뜻을 지녔는데 실제 화백회의에 왕이 참석하지않아 그 의미가 바르게 되기 시작한것은 언제부터이고 어떤 이유로 참석하지않게 된 것인가요?
2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백회의와 같은 경우 왕이 참석하지 않게 된 것이
그만큼 유력 귀족들의 힘이 그만큼 강해졌기에
우ㅘㅇ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법흥왕때까지 화백회의에 국왕이 참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왕은 6부 대표자의 하나였던 존재를 초월하게 됨에 따라 지난 날 왕이 수행했던 화백회의 의장이 필요했는데, 그 것이 법흥왕 18년 설치한 상대등이라는 관직입니다.
상대등의 기능은 귀족회의인 화백회의 주재자로 국왕권의 상승을 의미하며, 귀족과 왕 사이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으나 점차 귀족을 대표하는 지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