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극비리에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극비리에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훈민정음을 극비리에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역사적으로 어떠한 이유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글창제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문을 보면 첫째는 새 문자를 만들어 단독으로 쓴다는 말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면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화의 문자 인 한자를 대신하여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 가 된다는 논리, 셋째는 설총의 이두로써 가능한 일 을 굳이 훈민정음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 넷째는 창제 취지 중 하나로 훈민정음 보급이 억울한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가 옳지 않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의 골자는 '사대'와 '권위'였습니다. 당시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그들은 이 두 가지 원칙을 국가를 유지하는 철칙으로 여겼기에 이 철칙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학자 또는 선비로서 갖는 권위주의가 도사리고 있었고 적어도 문자는 자기들만 아는 것이라 학문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사고에 빠져 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민정음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의 중국 문자에 너무 의존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한글을 만들게 된 것 입니다. 한글 창제를 미리 알게 되면 많은 양반들이 이를 반대 할것이 분명 하기에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혼자 만들게 된 것 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까지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배웠으나 여러 사료들로 추정해보면 훈민정음은 세종의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은 세자는 물론이고 안평 대군과 진평 대군 사가에 나가 있던 정의 공주를 은밀히 불러 모았습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겠다는 얘기를 꺼냅니다. 이에 진평 대군이 명나라의 문자를 버리는 건 사대의 예를 저버린 것이다라고 하자 세종은 네 말이 맞지만 중요한 것은 명나라가 아닌 내 나라 내 백성이니 백성들이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문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백성들이 글을 알면 않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 사대부들의 잘못을 나에게 글을 써서 알릴 수도 있고 새로운 문자는 백성들에게 큰 힘이 될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훈민정음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1443년에 창제되었으나 반포는 3년 뒤인 1446년에 이뤄집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상소를 올려 한자사용으로 발달된 문물을 접할 수 있고 특별히 불편함이 없다는 내용만을 주장하였습니다. 세종은 상소를 올린 신하들을 다 감옥에 보내버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만리의 상소문을 보면,
첫째는 새 문자를 만들어 단독으로 쓴다는 말이 중국에 흘러들어가면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둘째, 중화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해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는 논리
셋째 , 설총의 이두로써 가능한 일을 굳이 훈민정음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
넷째 , 창제 취지 중 하나로 훈민정음 보급이 억울한 사람을줄일수있다는 논리가 옳지않다는 것
당시 대개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동시에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들은 이 원칙을 국가를 유지시키는 철칙으로 여기고 이러한 철칙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이었습니다.
또, 그들 내면에 학자 또는 선비로서 갖는 권위주의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문자는 자기들만의 것이고 학문은 자신들의 고유 영역으로 생각, 그들의 학문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유학과 한자로 그들에게 평민은 그저 이두 정도나 알고 있는 무식쟁이였고 천민은 그것조차도 모르는 짐승같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훈민정음 창제는 달가운 것이 아니었으니, 반대하였고 세종은 그런 현실을 미리 간파, 비밀리에 제작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