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은 왜 만든 것인가요
고려시대 몽골 침입 뒤에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드는데요 팔만대장경을 만든다고 해서 외세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입니까 그것도 전쟁 중에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반에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고자 국가가 주도하여 조성하였습니다.
불교가 보편적인 문화로 향유되던 중세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조성은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기술을 상징하였습니다.
고려의 국력을 대내외에 과시했던 고려 팔만대장경은 현재에도 그 경판이 국보 3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07년 등재)으로,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5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5년 등재)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
힘든 전쟁 중에 굳이 팔만대장경을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불교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어요.
고려 시대에는 왕실은 물론 백성들까지 불교를 믿었어요. 따라서 대장경을 새로 만들어 불교의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던 거예요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목판에 새긴 불교 경전집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실용적인 측면에서 외세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고려 시대라는 것을 염두해야 합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실학파들이 조선 후기에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때는 그 국가를 방어하는 데 신성한 보호와 도움을 구하는 것이 었습니다. 외세의 침략에 대한 문화적, 정신적 저항의 상징인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국교가 불교로 불교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요. 고려 시대에는 왕실은 물론 백성들까지 불교를 믿었습니요.
따라서 대장경을 새로 만들어 불교의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경판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대장경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을 중심으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인 1251년 9월 25일(양력으로 10월 11일)에 완성한 것이다.
몽골군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에서 국력을 기울여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하여 판각하였으며,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대장경판을 통하여 초조대장경인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문화사에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일반적으로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000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000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고려 현종 때 새긴 판을 ‘초조대장경판’이라 하고, 고종 때 이것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버려 다시 대장경을 새겼기 때문에 ‘재조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종 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겨진 판으로 지금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해인사고려대장도감(각)판〔海印寺高麗大藏都監(刻)板〕’이라고 함이 가장 정확한 명칭이다. 이 대장경은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 · 강화의 분사(分司)대장도감에서 16년의 기간이 걸려 완성한 것이다.
이 때 최우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주1인 수기(守其)가 내용 교정을 맡아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나라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주2하여 오류를 정정하였다.
이 대장경판을 새길 때의 배경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 판각을 부처님에게 고하고 있다. 1237년(고종 24)에 쓴 이 기고문에 이미 대장경 판각을 위하여 담당관사를 설치하였음이 나타나 있다.
이 대장경판은 성격상 정장(正藏)과 부장(副藏)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장은 『대장목록(大藏目錄)』에 수록되어 있는 경을 말하고, 부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지 못한 『종경록(宗鏡錄)』 등 4종을 말한다. 정장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1,497종 6,558권의 경을 말하며, 부장은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4종 150권이 있다.
정장의 함별(函別) 구성을 보면 경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에서 동함(洞函)까지 639개함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는데, 첫번째 경인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00권)은 천함에서 시작하여 한 개의 함에 10권씩 묶어 60번째 함의 나함(奈函)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한 개의 경도 분량이 많은 것은 여러 개 함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으나, 단권(單卷)의 경인 경우 여러 개의 경이 한 개의 함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함별구성에는 일정한 원칙이 없다. 첫번째 경의 경우처럼 10권씩 묶어 한 개의 함을 구성하고 있는가 하면, 79번째의 경은 12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으며, 1,256번째 경은 6권씩 묶어 한 개의 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함(傷函: 函順160番)의 경우는 단권의 경 29권을 수록하고 있다.
이 대장경판의 저본경(底本經)은 천함(經順 1)에서 영함(英函: 經順 1087)은 『개원석교목록(開元釋敎目錄)』의 경이며 반함(磻函, 經順 1263)에서 합함(合函: 經順 1387)은 『속개원석교록(續開元釋敎錄)』에 있는 경을 수록하였다.
이외의 사함(社函: 經順 1088)∼명함(銘函: 經順 1262)과 제함(濟函: 經順 1388)∼동함(洞函: 經順 1497)은 별개의 것인데 이들 판의 저본은 현재 미상이다.
각 판의 대부분은 상하 단변(單邊) 무판심(無版心)이며 권자본주3형식(卷子本形式)의 판식(版式)으로 한 면에 23행 14자씩 새겨져 있다. 그러나 경순 1256, 1404, 1497은 판심이 있고, 경순 1257은 행자수가 18행(小字는 36行)이며, 자수가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1258은 22행 13∼15자(小字는 44行17字)이고 1259는 21행 13∼14자(小字는 42行16字)이며, 1260은 22행 13자로 전부 소자(小字)이고 1261은 25행 16자이다.
이들 경순 1256의 녹함(祿函)에서 1261의 무함(茂函)까지는 『종경록』과 함순이 중복되는 경으로서 일반 정장과는 판식을 달리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간기(刊記)가 예외없이 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다.
이들 간기를 중심으로 정장을 판각연도별로 분류하여 보면 연도별 판각량이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마다 일정량의 판각계획에 의하여 판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장판각의 순서에 있어서도 뒤로 오면서 상당히 경순이 바뀌어 판각되었다. 또한, 같은 경에 있어서도 권순별로 판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도 판하본(板下本) 작성에서부터 초벌새김 · 재벌새김 · 마무리새김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러한 작업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각수(刻手)의 능력 및 판각작업의 진행속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