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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한파리매183
팔팔한파리매18323.10.23

이괄의 난에 대해 궁금합니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쉽게 항복한 것은 이괄의 난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이괄의 난이 어떤건가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만약 이괄의 난이 없었으면 어떻게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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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괄은 반정에 참여하여 2등공신에 책봉됩니다.

    그는 군사적 재능이 탁월한 듯 한데,

    반정 당시 군사들이 우왕좌왕 하며 흔들렸으나

    이괄이 대장이 되자 군이 정돈되었다 합니다.


    인조가 즉위한 뒤 조정은 그를

    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합니다.

    당시 북방에 자리한 후금의 위협이 문제가 되어

    이를 대처할 유능한 인재로 이괄을 선발한 것이죠.


    이괄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해

    군사 훈련, 성곽과 목책 보수, 북방 경계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 2년인 1624년,

    이괄의 아들 이전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이 올라옵니다.


    이에 대신들은 이괄을 소환하여 조사하라고 하나

    인조는 고변의 진위를 의심하여

    이괄을 조사하는데 끝까지 거절하였습니다.


    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을 소환해 조사토록 했는데

    이때 이전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이괄은 아들이 끌려가 모반죄로 처형되면

    자신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 여겨 거병합니다.


    이에 정예군 1만과 항복한 왜군 300여 명을 거느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합니다.

    인조는 이괄을 피해 공주로 파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부대와

    안현에서 전투하여 이괄의 군대가 패배하였습니다.

    이괄은 도주하였으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고

    그렇게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습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 정권 초반에 있었던

    공신 간의 갈등과 지나친 견제가 불러온 사건이며,

    이괄의 부하 중 일부가 후금으로 도주하여

    조선의 사정을 알림으로써 정묘호란이 발생하는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1624년 일으킨 반란으로, 한때 한양을 점령하나 반란군의 내부의 분열과 관군의 반격으로 실패했습니다.

    이괄은 조선의 15대 임금인 광해군 때부터 인조 때까지 무신으로 활동, 그는 서인 세력이 1623년 광해군을 임금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인조를 새로운 임금으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우나 그는 인조반정 후 권력을 잡은 사람들과 사이가 나빠 공을 세우도고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던 중 이괄은 후금이 북쪽의 국경을 위협해 국방 문제가 심각해지자 평안북도 병마절도사로 가게 되는데 1624년 문회와 허통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 이에 이괄과 관련된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으나 역모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후 이괄의 아들까지 한양으로 불러들여 조사하려 하자 이괄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괄은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와 한양을 점령,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을 새 임금으로 내세우나 이괄은 그를 배신한 부하 장수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반군도 진압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