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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남생이120
조용한남생이12023.04.05

십자군 전쟁은 어떤 이유로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유럽의 유명한 종교 전쟁인 십자군 전쟁 같은 경우 어떤 역사적 배경으로 그 전쟁이 일어 나게 된 것인지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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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로 그리스도교 5대 교구 중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은 7세기 이슬람의 확장 시기에 이미 이슬람이 가져갔지만, 우마이야 이후 대다수 이슬람 왕조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개인적인 순례를 막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10세기~11세기에 이집트와 시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파티마 칼리프조는 시아파 중에서도 유별나게 그리스도교 국가들과 친했기 때문에(마케도니아 왕조 후기 이후로는 거의 동로마와 암묵적 동맹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순례는 자유로웠고, '그리스도교인들도 그정도면 납득하지 뭐'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1081년, 만지케르트에서의 참패 이후 강경 수니파인 셀주크가 아나톨리아 내륙과 시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스도교인들의 순례를 막습니다. 결국, 십자군전쟁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시리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이교도에 대한 성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십자군전쟁이 일어난 정치적인 이유로는 지난 500년여 동안 홀로 이슬람을 막아내던 동로마군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붕괴되면서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래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아나톨리아가 이슬람에게 넘어가고, 그에 따라 아나톨리아 해안가의 나머지 동로마 영토들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됩니다. 더군다나 동로마는 이슬람뿐만 아니라 노르만 인들과 페체네그 족까지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고 (우리나라로 치면 60만 국군 중에 50만이 일본과의 전투에서 져서 일본군이 경상도를 점령한 상황에서 북한이 내려오는 데다가 대만도 전라도를 공격하는 느낌입니다), 결국 라틴인 군사들을 일종의 용병 개념으로서 이슬람과의 싸움에 투입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당시 서유럽은 국가체제가 거의 완성되어가던, 혼란기의 막바지였습니다. 군주들에게 있어 큰 전쟁도 거의 없는데 쓸데없이 많은 맨엣암즈와 자유기사들은 사회적 분란만 일으키는 말썽쟁이들이었죠. 또, 맨 엣암즈와 자유기사, 그리고 귀족가의 차남, 삼남 등은 출세할 만한 길이 아버지 세대에서 끝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교황이 십자군 소집을 외치자, 이들은 신분상승을 위해 참여하게됩니다.

    또한 경제적 이유로는 당시 동방은 서유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사회인프라, 도시화가 발달되었었습니다. 당시 서유럽 최대도시였던 파리의 인구가 6만명 이하였던 데 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40만, 바그다드는 20만명이 사는 대도시를 구축했었죠. 서방은 언제나 동로마가 무역을 통해 팔거나 사신을 통해 나눠주는 동서무역의 콩고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십자군 전쟁은 그러한 동서무역의 중심인 시리아, 레반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겠다는 심리가 당연히 들어가 있었습니다.

    십자군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와 문명의 충돌로써 서양의 중세사에 가장큰 의미를 가진 전쟁이며 이 전쟁의 배경에는 교황과유럽영주들의 잇속과 이해타산이 엉켜 원래목적인 성지탈환은 뒷전이고 전리품 노획과 약탈이 우선된 전쟁이였습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마자 이슬람교도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했고, 포로의학대 행위로 인해 이슬람을 뭉치게 했고 그 결과 결국 성지회복은 실패했으며, 십자군은 타락하여 중세 상인들의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독단적인 의도가 강해 이루어진 전쟁이기에 이를통해 교황의 권위 신분사회의 후퇴 중세사회 영주의 몰락을 초래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으로 인해 상업과 도시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서유럽에 한정되어 있던 도시들의 상권이 동방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은 동방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서유럽의 도시가 파괴되거나 할 일은 없었습니다.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서유럽의 군사 물자나 생필품 등을 동방으로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무역을 활성화 시키는데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무역의 활성화는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구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전쟁이지만 노예는 자유를 위해서, 성주는 명예와 영토를 위해서, 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교황은 권력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결과 : 1차만 성공한 후 나머지는 다 실패한다.


    이후 변화: 교황과 왕의 지위가 강화되고 군주, 성주들의 지위는 약해졌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인과 이슬람교, 두 그룹이 신성하게 여기는 성지를 장악하기 위해 시작된 기독교인과 이슬람교 간의 일련의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총 109개의 주요 십자군 원정(규모, 강도 및 성공 정도가 다양함)이 1291년까지 계속 발생했습니다. 당시 천문학적인 비용이 많이 들고 폭력적이며 종종 무자비한 갈등은 유럽 기독교인의 지위를 높여 중동의 땅을 위한 투쟁의 주요 역할을 맡았는데요.

    1095년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은 유럽서방의 기독교인들에게 무기를 들어 비잔틴 제국을 돕고 이슬람의 통제로부터 성지를 탈환할 것을 촉구했고 이것은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십자군 전쟁은 단순히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리는것을 넘어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모든 그룹을 적으로 간주하여 싸우는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해서 최후의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점점 종교 개혁과 더불어 교황 권위의 쇠퇴와 함께 지원이 감소되면서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영향은 무엇일까요?

    십자군 전쟁은 궁극적으로는 유럽인의 패배와 무슬림의 승리를 가져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십자군이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범위를 성공적으로 확장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부의 증가를 경험했으며 십자군 전쟁 중에 교황의 권력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무역과 운송도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유럽 전역에서 개선되었습니다. 전쟁은 공급과 운송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를 창출하여 조선업과 함께 다양한 보급품의 제조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전역의 여행과 지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르네상스의 길을 닦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 입장에서는 십자군은 부도덕하고 피비린내 나고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슬람교도, 유대인 및 기타 비기독교인에 대한 무자비하고 광범위한 학살은 수년 동안 잊지못할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무슬림들은 서방의 중동 개입을 "십자군"이라고 조롱하고 있다고 하네요.

    십자군 전쟁이 가져온 수년간의 전쟁과 갈등이 수년 동안 중동과 서유럽 국가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 문화적 견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 발 아래 들어간 가운데 이슬람 세력의 동로마 제국 공격이 격해지자 동로마 제국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교황은 자신의 권력 강화 및 영주들의 새로운 영토 확보 등으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주로 서유럽의 기독교인과 중동의 이슬람교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십자군은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을 포함하는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주요 원인 중 일부는 성지(특히 예루살렘)를 장악하고, 중동에서 기독교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독교 순례자를 보호하고, 서유럽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망을 포함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문화 교류, 경제적 영향, 지정학적 변화를 포함하여 유럽과 중동 역사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의 결과는 복잡하고 다양했으며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역사적 논쟁의 주제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서유럽인들에게 가져다준 즉각적인 이득 중 일부는 중동에 십자군 국가를 세운 것이 포함되었고, 장기적인 결과에는 서유럽 문화, 무역 및 정치의 형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또한 종교적 긴장, 갈등, 양측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포함하여 심각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세기 중엽부터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아프리카 북쪽에 위치한 튀니지를 근거로 하여 지중해 여러 섬들을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성베드로 성당과 모테카시노의 수도원 등의 유서깊은 대사원도 불태우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의 씨앗이 되었고

    중세 유럽에서는 가톨릭이 번성하면서 성지순례하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셀주크투르크족에 의해서 이슬람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장악했고 이로 인해 성지순례가 방해받기 시작합니다.

    비잔틴제국이 공격했지만 대패했고, 우르바노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니 이에 교황은 동방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하며 유럽 전체의 세력을 규합해 십자군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십자군전쟁은 중세유럽사회 봉건제도와 가톨릭 교회를 기반으로 안정을 이루며, 그동안 쌓여온 힘을 내부에서 싸움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방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권은 몰락했으며 신앙은 더 약화되었으며 농업 경제를 담당하고 있던 장원 경제가 붕괴되면서 기사들의 권위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중세유럽은 르네상스에 한걸음 다가가게 되었고 중세유럽이 몰락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중세 라틴 교회에 고민을 받은 원정대 하고 이슬람 군대 사이에서

    레반트라는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종교 전쟁 입니다.

    즉 교황의 권력을 찾기 위한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성지 회복
    로마 제국 시기인 3세기경부터 레반트 일대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다수가 기독교도였다. 하지만 7세기 중반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슬람 팽창으로 637년에 예루살렘도 이슬람 령이 되었고 기독교를 믿는 지역은 11세기까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잃는 등 그 영역이 지속적으로 줄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사람들은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습니다.

    2. 교황권의 세력 확장
    이슬람권의 세력이 점차 확장되자 그 전파를 막고 교황의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각 영주의 힘이 약해지고 근대적 절대 왕정이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 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들의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입니다.

    당시 이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를 표시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배경은 셀주크 튀르크 예루살렘 점령으로 비잔티움 황제가 로마교황에 도움을 요청하자 7번의 대규모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지는데요. 당시교황 이었던 우르바누스 2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가 박해받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으려 가야하며 이는 신이 원한다고 주장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참전: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로 회복하는 데 있었으며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진격하며 이 또한 성지순례 참여 의식으로 여겼습니다.

    - 경제적인 측면: 경제적, 정치적이 같이 세속적인 요소들도 섞여 있었으며 십자군 전쟁 전 서유럽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영토가 부족했기에 기상청은 토지 획득을 추구했고 농민과 수공업자들까지 기회의 땅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교회국가들의 군사적 충돌입니다. 이전에는 로마 카톨릭교와 동방 교회(그리스도교 정교회) 사이의 성직자와 교리에 대한 분쟁이 있었는데, 이러한 분쟁은 이후에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십자군이 선포된 것은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 때로, 이 때는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교황은 이슬람교도들의 성지 점령을 막기 위해 십자군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1096년부터 1270년까지 총 8차례의 십자군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십자군의 목적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포함한 중동 지역의 토지와 이슬람교도들의 성지 점령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과의 충돌 뿐만 아니라 각 십자군 군단 간의 경쟁과 이익충돌도 발생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 마지막 십자군인 8차 십자군까지는 유럽 기독교 세력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이슬람교도들에게 재점령 당했고, 이후 성지는 계속해서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중동 지역에 대한 지식과 문화를 얻게 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이후의 문화와 예술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과의 충돌과 희생으로 인한 인간적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자군의 태동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고 또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배타적 싸움이라는 점에서도 종교전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는 복합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 십자군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성지(聖地)로 생각하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수행한 전쟁입니다.

    처음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성지 순례를 방해받는다는 호소로 시작되었고, 이 전쟁에 참여해서 죽는 사람은 생전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성전(聖戰)이라는 인식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서구의 입장에서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지만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평화롭게 살고 있는 자신들의 땅에 십자군이 들이닥쳐 학살과 약탈 등을 자행한 침략 전쟁이었습니다.

    2000년 3월, 로마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하면서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교회가 인류에게 범했던 과오를 공식적으로 참회했습니다. 교회의 과거 죄악에는 중세의 종교 재판, 신대륙 원주민 학살, 유대인 탄압에 대한 묵시적 동조 등과 함께 십자군 전쟁이 포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