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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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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나요?

영화 사도를 보고 궁금증이 생겨 여쭤봅니다. 영화에는 허구와 소설이 많기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나요?뭔가 특별한계기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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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영조가 처음부터 사도세자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영조는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혹과 극중에서 허드렛일하는 최하층 무수리 최씨의 소생이라는 출신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 사도세자에 거는 기대가 너무 컸죠. 그러나 아들 사도세자는 무인 기질이 강하여 경서를 읽고 공부하기 보다는 무예에 출중했고 동궁에 있던 거처의 궁녀와 궁인들이 모두 경종을 모시던 이들이어서 경종의 일에 대해 안타까이 여기던 분위기 속에 키워졌다고 합니다. 아버지 영조의 반대 세력의 정치적 입장에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또한 영조가 당시 수명으로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인데다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해 칭찬 대신 훈육과 질타를 자주 하게 되었으며 결국 사도세자는 정신적인 문제로 망가져버렸다고합니다. 또 영조의 결벽증도 둘을 악화시켰다고 합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겉으로는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란 시호를 내렸지만 이는 정조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시늉일 뿐이었고 사도세자의 묘를 흉지에 내팽겨쳐지게 만들고 정조에게 사도세자를 추승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즉, 처음 태어났을 때와 어렸을 때는 나름 애정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영조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애정은 거의 없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는 어린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 하며 대신들을 불러 한번씩 직접 안아보게도 하고 세자에게 글씨를 쓰게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게 하는 등 세자를 몹시 총해했습니다.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실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공식 입적 후 원자로 정했고 이듬해 영조 12년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정식책봉하고 갓난 세자에게 기대가 커서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인 자신이 직접 꼬박 밤을 새 가면서 필사했고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 특별히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영조의 사도세자를 향한 아동학대는 어릴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살때까지는 세자를 매우 아끼며 하는 일마다 칭찬했지만 4살때부터 구박하고 혼내기 시작합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 나머지 엄격하게만 키우다보니 세자는 이미 9살때부터 부왕을 만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 후궁 소생인 자신의 출신을 극복하기 위해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였던 아들 사도세자의 교육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사도세자를 학대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영조의 지나친 조기 교육으로 인해서 사도세자에게 무리를 주었고

      간섭또한 엄청났기 때문에 나중에 좋은 관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가 아들을 어렵게 얻었기에 사도세자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는데 소론들이 세자 주위에 모여드는 모습에 영조는 대단히 불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왕 수업도 제한적으로 시키고 영화에서 보듯 정신병이나 궁인 살해 등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붕당 간 갈등이 근본원인으로 작용하여 사도세자가 죽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처음에는 영조도 세자를 총애하고 좋아했다고 하는데, 세손이 태어나고 세자가 '문' 보다는 '무'에 관심을 더 보이자 탐탁치 않게 생각하게 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고 일반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세손 산(후의 정조)의 즉위를 위해 세자가 제거되었다고 보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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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인 정조(영조의 아들)의 처음부터 안좋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조는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풍성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사도세자인 정조도 그런 노력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조와 영조는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정조는 자신의 부친인 영조의 정치 방침과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영조는 이에 대해 대처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깊어짐에 따라 영조는 정조에 대한 불신을 품게 되고, 결국 정조를 신경질적인 아들로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세자인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며, 영조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는 시도를 합니다. 이에 대해 영조는 반발하며, 정조를 감금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정조는 자신의 입장을 인정받고 궁중에서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안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과 갈등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영조와 정조의 관계는 끝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