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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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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왜 김홍도를 좋아하게 됐나요?

김홍도는 조선시대 엄청난 화가로 당시에도 모든 귀족, 백성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하던데요. 그런 김홍도를 정조는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하던데, 왜 그런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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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습니다. 그에 대해 강세황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습니다.

      벼슬살이를 하고 돌아온 40대의 김홍도는 화조화, 기록화 등을 주로 그렸습니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 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렸고, 그 이듬해 사신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시며 현륭원을 건설할 때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의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해, 조선 후기 불화의 명작 중 하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입체감을 나타내는 음영을 넣어 독특하게 표현한 이 불화들은 기존의 화풍을 뛰어넘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습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만 3년 뒤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파직돼었습니다. 백성들 중매를 해주던 인간적 관리였으나 행정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현감 자리를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해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습니다. 50대에 이른 김홍도의 그림들은 보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대담한 생략과 거침없는 붓길이 대가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시기의 대표작들은 [해산선학도], [마산청앵도], [세마도] 들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홍도는 영조 말년 세손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정조로부터 많은 배려와 관심을 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는 조선의 아름 다운 산수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김홍도를 영품 현감으로 보내서 제천과 단양을 유람한 뒤 산수화를 그려 바치라고 했다고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 만으로도 정조가 왜 김홍도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사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