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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29
중강개시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있었던 중강개시라고 하던것은 어떤 것인가요?

중강개시가 있었던 그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의주의 대안(對岸)인 중강(中江 : 압록강의 난자도)에서 열렸던 중국과의 공무역을 하던 국제 시장.

    처음에는 임진왜란 중 군량미 조달책의 하나로 명나라의 미곡(米穀)과 조선의 은·동·무쇠[水鐵] 등을 무역하였다. 그러나 난이 끝난 다음 중지했다가, 명나라·청나라의 세력이 교체된 뒤 청나라의 일방적 요구로 계속되었다.

    1593년 난으로 인한 조선의 기근 구제와 군마(軍馬)조달을 위해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요동에 건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혹심한 식량난으로 무명 1필 값이 피곡(皮穀) 1두(斗)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강에서는 쌀 20여 두에 달했고, 은·구리·무쇠로 교역한 자는 10배에 가까운 이익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초기에 불과했고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여 왜란이 끝난 1601년에 혁파하였다. 이듬해 명나라의 요구로 다시 열렸다가, 1609년 또다시 혁파되었다. 1646년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다시 설치하고, 3월 15일과 9월 15일의 두 차례에 걸쳐 교역하도록 정했다가 농번기에 해당된다 하여 2월15일과 8월 15일로 고쳐 정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농우(農牛)·소금·지물(紙物)과 해대(海帶)·해삼·면포·사기 등을 수출하되, 관허(官許) 교역 이외 사상(私商)의 잠입을 일체 금하고 암말[牡馬]과 인삼의 교역을 금하였다.

    이상의 교역 물품은 개성부(開城府)와 황해도·평안도 감영(監營)에서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고, 별장(別將)을 따로 정해 의주에서 모여 기다렸다가 기일이 되면 별도 차사원(差使員)이 역학훈도(譯學訓導)와 함께 중강에 가서 봉성통관(鳳城通官)과 값을 정하고 서로 교환하는 방법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점점 해이해졌다. 반면 사상은 성행해 대청교역(對淸交易)은 사실상 자유무역처럼 되어 이후 5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이를 중강후시(中江後市)라 하였다.

    더욱이, 만상(灣商)과 송도(松都)상인 등은 조선 사행이 입연(入燕)할 때 끼어들어가 봉황성(鳳凰城)의 책문(柵門)에서 공공연히 밀무역을 행했는데, 이를 책문후시(柵門後市)라 하였다. 이들의 범위가 더욱 커져 결국 조정에서 세금을 받고 공인하게 되자, 중강개시는 자연 1700년(숙종 26)에 그치고 말았다. →중강후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강개시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압록강 근처에서 청국과 무역하기 위하여 함경도 회령에 개설된 무역 시장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에는 임진왜란 중 군량미 조달책의 하나로 명나라의 미곡(米穀)과 조선의 은·동·무쇠[水鐵] 등을 무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난이 끝난 다음 중지했다가, 명나라·청나라의 세력이 교체된 뒤 청나라의 일방적 요구로 계속되었습니다.


    1593년 난으로 인한 조선의 기근 구제와 군마(軍馬)조달을 위해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요동에 건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혹심한 식량난으로 무명 1필 값이 피곡(皮穀) 1두(斗)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강에서는 쌀 20여 두에 달했고, 은·구리·무쇠로 교역한 자는 10배에 가까운 이익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초기에 불과했고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여 왜란이 끝난 1601년에 혁파하였습니다. 이듬해 명나라의 요구로 다시 열렸다가, 1609년 또다시 혁파되었습니다. 1646년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다시 설치하고, 3월 15일과 9월 15일의 두 차례에 걸쳐 교역하도록 정했다가 농번기에 해당된다 하여 2월15일과 8월 15일로 고쳐 정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농우(農牛)·소금·지물(紙物)과 해대(海帶)·해삼·면포·사기 등을 수출하되, 관허(官許) 교역 이외 사상(私商)의 잠입을 일체 금하고 암말[牡馬]과 인삼의 교역을 금하였습니다.


    이상의 교역 물품은 개성부(開城府)와 황해도·평안도 감영(監營)에서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고, 별장(別將)을 따로 정해 의주에서 모여 기다렸다가 기일이 되면 별도 차사원(差使員)이 역학훈도(譯學訓導)와 함께 중강에 가서 봉성통관(鳳城通官)과 값을 정하고 서로 교환하는 방법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점점 해이해졌습니다. 반면 사상은 성행해 대청교역(對淸交易)은 사실상 자유무역처럼 되어 이후 5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이를 중강후시(中江後市)라 하였습니다.


    더욱이, 만상(灣商)과 송도(松都)상인 등은 조선 사행이 입연(入燕)할 때 끼어들어가 봉황성(鳳凰城)의 책문(柵門)에서 공공연히 밀무역을 행했는데, 이를 책문후시(柵門後市)라 하였습니다. 이들의 범위가 더욱 커져 결국 조정에서 세금을 받고 공인하게 되자, 중강개시는 자연 1700년(숙종 26)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강개시는 조선시대 의주의 대안인 중강에서 열렸던 중국과의 공무역을 하던 국제시장입니다.

    선조 26년 영의정 유성룡이 임진왜란으로 생긴 조선의 기근 구제와 군마 조달을 위해 요동에 건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중의 기황을 계기로 랴오둥 지방의 미곡 수입을 위해 1593년 처음으로 개설되었다가 1601년 폐지되었는데 청나라의 건국 후인 1464년 다시 열고 해마다 3월 15일과 9월 15일의 2차에 걸쳐 엄중한 감시 아래 무역하게 했으나 그 시기가 농번기와 겹치는 폐단이 있어 이듬해부터는 2월과 8월로 고쳐시행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후기 청나라와 일본의 무역을 조선이 중계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금광과 은광을 개발박차를 가하고 조선삼(고려인삼)을 수출하였습니다.

    여기서 조선삼은 중국과 일본에 약효로 매우 높이 평가받은 약재이기 때문에 고가로 팔릴뿐더러 잘팔리기 까지 했습니다. (당시 삼은 지금으로 말하면 재배하여 기르는 재래인삼이 아닌 산삼입니다.) 하도 매매가 잘되다 보니까 멸종위기까지 놓여지게 되었고 그래서 인삼수출이 금지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인삼재배에 성공하여 재래삼을 중국과 일본각국에 수출하게 되었는데 약효가 떨어진다고 저평가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심끝에 인삼을 쪄서 말리기 시작하여 팔게 되는데 인삼을 쪄서 말릴수록 효능은 더 배가 되기 때문에 다시 삼무역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쩌서말린 삼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홍삼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개시 무역은 공무역 즉, 국가가 주도하던 무역이므로, 중강개시는 현재 '중강군(북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공무역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