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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양녕대군이 다시 한양으로 올라왔나요?

양녕대군은 폐세자이후 유배를 갔었는데 유배이후에도 녹봉을 받았나요 세종시절에도 받았죠?
그리고 양녕대군이 폐세자 이후 대군시절에 다시 한양으로 올라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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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사망한 곳이 서울의 자택이라고 합니다.

    폐출된 양녕대군은 즉시 강화(江華)로 거처가 옮겨졌다(6월 22일). 51세로 아직 노쇠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태종은 새로 임명된 세자에게 곧바로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8월 8일). 그때부터 붕어할 때까지 4년 동안, 태종은 국무의 핵심인 인사와 군정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국왕이 안정적으로 왕권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 뒤 양녕대군은 주로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거주했습니다. 정치적 분란의 가능성을 우려한 신하들은 그에게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격렬하게 탄핵했습니다. 실제적인 위험의 가능성도 있었다. 1424년 3월 청주(淸州) 호장(戶長) 박광(朴光)과 같은 해 10월 갑사(甲士) 지영우(池英雨)는 “양녕대군이 즉위하면 백성들이 자애로운 덕을 받게 될 것”이라거나 “그가 병권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등의 난언을 퍼트려 처벌되기도 했습니다.

    양녕대군은 1462년 9월 7일 서울의 자택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쳤습니다.

    68세의 장수한 나이였고,세 살 아래로 53세에 붕어한 세종보다 12년이나 오래 살았습니다.

  • Slow but steady
    Slow but steady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양녕 대군은 폐세자가 된 후 다시 한양에 돌아왔습니다. 세종은 왕이 되고난 후에도 양녕 대군을 무시 하거나 경계 하지 않고 형으로서 잘 대해 주었다고 합니다. 1462년 (세조 8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4명의 왕을 모시면서 많은 정치 참여를 합니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고 시와 서에 능하였으며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의 현판의 글씨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양녕대군은 폐세자 후에도 녹봉을 받았습니다. 양녕대군은 1418년(태종 18년) 폐세자된 후, 유배지인 청풍부(淸風府)에서 10년 동안 살았습니다. 1428년(세종 10년)에 세종이 양녕대군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였고, 1430년(세종 12년)에는 대군으로 책봉했습니다. 양녕대군은 대군으로 책봉된 후에도 녹봉을 받았으며, 1442년(세종 24년)에 사망할 때까지 한양에서 살았습니다.

    양녕대군은 폐세자된 후에도 녹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조선의 법률상 세자와 대군은 모두 공신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신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분으로, 공신은 공신녹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태종이 즉위하면서 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세자로서 품행이 불량하여 1418년(태종 18년)에 폐세자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대군은 공신으로 취급되어 녹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