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부분까지를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의료기술이 발전해서 본인이 지금 기억하고 있는 모든것들을 또 다른 몸에 옮긴다고 한다면, 그건 저 자신이 맞을까요? 그렇다면 정신을 기준으로 본인을 지칭하게 되는걸까요?
무더기의 역설이라는 한줌의 모래에 대한 예시를 듣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론 머스크가 뉴럴링크라는 회사를 통해,
인간의 뇌에 칩을 이식하고 컴퓨터와 연결하여 전자기기를 생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실험하고 있다네요.
2020년 돼지와 원숭이 뇌에 이식실험을 해 왔는데,
지난 해에는 인간실험을 하겠다고 했고,
올 해는 인간실험 임상시험 책임자 채용공고를 내었네요.
정부나 유관기관에서 인간실험을 허락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더기의 역설은 철학에서 연속되는 상황에서 어떤 시점이나 경계를 규정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한줌의 모래는 그 예로 제시되는 것이고요.
한줌의 모래를 놓고 모래알을 하나씩 빼어내면 어디까지를 한 줌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 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빼어내는 동안, 어느 상태가 한 줌의 경계일까요?
다시 하나씩 더하면 어느 경우가 한 줌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상태일까요?
질문자님의 의견처럼 인간의 경험으로 뇌에 쌓인 기억을 다른 몸에 옮길 수 있다면,
옮겨진 기억을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예로,
무더기 역설 중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가 있죠.
테세우스의 배에서 낡은 판자와 돛 등 부품을 대부분 새 것으로 교체한 것과
테세우스의 배에세 떼어낸 낡은 부품들을 조립해서 다시 배를 만들었다면,
어느 배가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서양철학에서 이성주의를 앞세워 이분법적 사고를 중시하는 경우에는 이런 경계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역설인 셈이고요.
역설(Paradox)이 성립하려면, 일반적 상식에 맞지 않거나 자체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역설이라는 단어가 의미가 있으려면, 상식, 이치, 의미라는 단어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어야합니다.
만약 전제가 옳지 않다면, 명제가 성립할 수 없듯이,
상식, 이치, 의미라는 것을 규정한 이분법적 사고체계가 옳지 않다면, 역설이라는 자체가 성립될 수 없죠.
서양철학은 그리스철학의 초기에 물질의 구성요소에 대한 근원을 찾는 데서 시작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것을 상상해 내었죠.
이데아사상이 옳지 않다면, 플라톤 이후 2500년간 철학의 근간이 된 이성, 상식, 이치, 수학, 의미는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설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지려면,
인간의 이성, 상식, 이치, 수학, 의미가 모두 옳아야만 가능한 일인데,
피타고라스가 만물의 근원이 수(數)라고 정의하고 수학적 정의를 통해 상식과 이치, 그리고 의미를 부여했죠.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정의는 이데아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타고라스식 상황에서만 옳은 것입니다.
선이든, 각이든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실체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죠.
일직선, 직각이라는 개념은 구부러지고 휘어져 존재할 뿐, 완벽한 일직선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현실에 가까운 근사치를 확인하기위해 미분, 적분을 사용해 보는 것이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상식에 도전한 지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동양사상은 무더기의 역설을 가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다시 환원하여 돌고 돌죠.
음양에 대한 이해도, 어느 것이 음이고, 양의 극단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얼나마 더 양에 치우쳐있는지를 생각할 뿐이죠.
질문자님의 질문에 답하자면,
자신이 생각할 때 얼마나 더 치우치느냐이며,
굳이 누군가로부터 그 생각이 옳다고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면,
그 선택이 명제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수치상으로나, 이성적으로 옳은 판단이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결국은 통계학적 도움이나 빅데이터의 도움을 받아서,
동시대의 사람들, 또는 나와 비슷한 나이, 직업, 삶의 방식을 가진 분들의 통계를 받아보실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정신을 기준으로 삼으시면, 본인, 자신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일단, 정신을 기억데이터로 보신다면, 둘 다 기억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본인의 기억데이터는 망각 또는 노화로 뇌세포가 죽으면서 기억이 지워질 테니,
기억 데이터를 옮겨놓은 신체가 더 본인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정신을 기억만이 아니라,
신체 각 부위와 사회적 상호관계에서 일어나는 기억의 조합으로 보신다면,
기억 데이터가 옮겨간 신체보다,
현재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를 더 본인, 자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재미있는 질문을 해 주셔서 저도 즐거웠습니다.
구정 잘 보내시고, 자신을 더 사랑하시는 새 해 되십시오.
'자신' 이라는 용어는 철학 심리학 등의 인문학에선 '자아(ego)' 라는 말로 대신해 사용해 왔습니다. 자신의 울타리에 대해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곤란하여 잠재적인 무의식적인 자아와 도덕적인 요청으로 초자연적인 자아를 자신의 개념으로 포함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포괄적인 자아라는 존재는 언어와 사유의 발달로 구조화된 개념일 뿐, 자아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논의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언론학에선 내적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상호작용을 인정하면서 자아의 포괄성을 전제하며, 자신과 외적 타인을 구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희랍 사상에서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이마저도 스스로 존재하는 내 자신인 '자아(自我)'의 외적 확장으로 여길 여지가 있게 됩니다.
이로써 자아중심적으로 무의식적인 본능과 의식적인 자아가 구분되어 있으나 일치시키는 노력, 그리고 외연으로 도덕적 윤리적 요청의 초자연의 울타리로 한데 묶여 포괄적인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의학 기술의 진보로 '나 자신' 이라는 존재가 타인의 몸으로 옮겨간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우의 '자신'의 개념도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의 또 다른 외연 확장으로 해석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