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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기미 상궁이 기미를 하는 중에 죽은 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임금 수라상 음식을 사전에 맛보고 검식했던 일을 하던 상궁을 기미상궁이라 했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정적의 독살 기도를 막기 위해 일종의 기미상공을 두곤 했습니다. "우리에게 쌀과 국수, 후추, 완두콩, 양배추 등이 주어졌죠. 음식을 모두 먹은 다음 1시간을 기다렸고 그때마다 몸에 이상이 생길지 몰라 불안해 했습니다"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기미상궁이던 '마르고트 벨크'의 회고 담입니다. 영국의 독살 기도설에 불안감을 느낀 히틀러는 15명의 기미상궁을 두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기미상궁이 음식을 먹고 죽은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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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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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에 전래된 성리학은 새로운 지식 운동으로 자리 잡으면서 고려사회에서 불교에 대항하는 정치 이념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당대 고려의 현실도 송나라 사대부들이 직면하였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이 많았는데 그들은 몽고라는 이민족의 침입, 농업, 생산력의 위기, 불교의 현실 도피 등 기존 사회체제로 해결할 수 없는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에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혁 세력으로 신진사대부가 힘을 얻어 갔고 비로소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이 건국될 수 있었지요 조선의 뿌리 내린 성리학은 사회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물론 짧은 시일 내에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정치 체제와 사유 구조, 나아가 가족의 의미까지 그 내면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워낙 전면적이고 넓은 범위의 것이어서 어느 한 부분만을 특정하여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러한 사회 기저의 총체적 변화는 성리학이 지향하는 정치 이상으로 귀결되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우선 성학을 공부하여 성인의 경지에 오른 군주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군주이며 동시에 만백성의 스승이 되는 존재로서 중국 고대의 문왕과 무왕과 같은 인물입니다 이러한 군주 밑에는 훌륭한 신하들이 있어야 하는데 신하들은 성리학을 충실히 학습하여 본연지성, 기질지성, 도심, 인심, 천리, 인욕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 사람입니다 아울러 실용적인 경세학에서도 밝은 사람이며 신하들 밑에는 만백성이 자리하고 있고 이들은 혼인을 통해서 가족을 구성하고 성리학이 제시하는 가족의 윤리에 따라 충실히 생산 활동을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면서 군역과 부세의 의무를 수행하고 친족과 향촌의 윤리 질서에도 귀속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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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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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역사에 관해... 쓰레기 만두파동이 몇년도에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004년 6월 쓰레기로 버려지는 중국산 단무지 자투리를 비위생적으로 씻어 유명 식품 업체에 만두 재료로 납품한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백화점, 할인점 등 유통업체에서 만두류 매출이 90%까지 격감하고 중소 만두 업체들은 줄줄이 도산 위기에 몰렸으며 식품 전체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습니다 이러한 만두 파동은 식품업계 전반에 식품안전과 위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으나 한편으로는 선의의 피해 업체가 속출하는 등 문제점도 노출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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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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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무신정권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신정권은 고려시대 중기에 무신들에 의해 나라가 통치된 시기와 그 당시에 정권을 일컫는 말입니다 1170년 무신들이 문신에 비해 자신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현원에서 무신정변을 일으켰고 기존의 고려를 지탱해 온 문신들과 지배계층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한 뒤 명종을 옹립했고 정권을 차지했지요 이후 숙청을 일으킨 무신들의 일가족과 친목 파벌들이 돌아가면서 100년의 기간 동안 고려를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무신정권을 시작으로 고려는 과거의 강성함을 잃고 밖으로는 외세의 동네북이 되고 내부로는 끝없는 반란과 무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고려시대 성립된 무신정권은 한국 사상 분명히 특색있는 정권이었고 고려의 무신정권을 독자성 주체성이 강한 정권으로 규정지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정권은 무엇인들이 단순히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독창성에 입각하여 독특한 정치 구조를 구축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독특한 정치를 운영하였고 한편 무신정권도 정권인 이상 정권의 안전 기조를 필요로 하였지요 그 안전 기조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무 겸전 체제의 정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의 수립 과정에서는 문신 귀족을 대량 제거했지만 곧 뒤이어 문신 체계를 정비하는데도 노력하였고 새로운 문신 체계는 일부 구문신 계열을 포섭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무신정권 아래에서 과거를 통하여 등용된 신진 사류가 점차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무신정권의 독자성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면에서 반영되어 독특한 양상을 자아냈지만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그 특색이 더욱 분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체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최씨 정권의 항몽 투쟁은 바로 그것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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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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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노론과 소론의 역사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론은 1680년에 창당이 되어 1727년에 해산이 되었고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하여 소론과는 대립하는 파벌이었습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 당파를 이루었고 1694년 남인을 제거하고 1728년 소론을 제거한 후 김교순 조만영 일가의 세도 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72년간 정권의 중심을 형성하였다고 합니다. 노론은 서인과 같이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하였지만 숙종 때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붕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인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노론,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소론이 되었으며 숙종 이후 조선의 주요 집권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서인들이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는데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그 문인 윤증 사이에 불화가 생겨 마침내 노,소 양파의 나뉨을 보게 되었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일파는 노론의 지목을, 윤종을 두호하는 일파는 소론의 지목을 지목을 받았지요 숙종 15년에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가 20년에 다시 서인 중의 소론파가 정권을 잡은 후로는 노론, 소론의 엎치락 뒤치락하는 싸움이 계속되었고 남인은 곧 세력을 잡지 못하고 말았지요 소론의 세력이 영조 때 몇 번 꺾인 후로는 오랫동안 노론의 독무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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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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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대체로 수명이 짧은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옛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짧은 것은 환경이 척박했기 때문이지 노화 속도가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장수는 가문 대대로 유전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노화는 유전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가문에 따라 수명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특정 질병에 대한 민감성 때문이지 노화의 차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현대의학은 현재 150까지 수명을 연장해 주는 신약 개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일부 의사들은 장수한 사람들의 유전자를 추출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식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고 장수 신약과 유전자 특허는 성공만 한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900년 인류의 기대 수명은 45세였지만 2000년에는 75세로 30년 늘어났고 분명한 것은 평균 수명은 연장되었을지 모르지만 건강은 과거보다 더 나빠졌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학의 유일한 기준은 죽음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살아만 있으면 수명 연장으로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늘어난 평균 수명을 의사들은 자신들의 공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지요 그러나 평균 수명의 연장은 상하수도 등 공중위생과 영양 개선이 주 원인이지 의사들이 여기에 끼친 공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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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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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가 처음 개발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기 자동차는 디젤 엔진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는 오토 사이클 방식의 자동차보다 먼저 고안이 되었다고 합니다 1832년부터 1839년 사이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사업가 로버트 앤더슨은 전기 자동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초보적인 전기 동체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였지요 1900년경까지는 전기 자동차가 최고 속도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어요 20세기에는 내연 기관 차량에 비해 높은 가격, 낮은 최고 속도와 짧은 항속 거리로 인해 배터리식 전기 자동차는 승용차로 사용하는 일이 전 세계적으로 드물어졌으나 적재, 화물 수송, 대중교통 분야에서는 전기 자동차가 계속 사용이 되었죠 21세기 초에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문제들 즉 배기가스에 대한 대기오염 탄화수소 기반, 운송 인프라의 지속 가능성 등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는 한편 전기 자동차 기술의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전기 자동차 및 대체 연료 자동차를 승용차로 활용하는 방법이 주목받기 시작하였죠 2010년 이후 2016년 9월에는 순수 전기로 구동되는 승용차와 승합차의 누적 판매량이 세계적으로 100만 대를 돌파했고 2019년 말에는 사용 중인 전기 자동차가 480만대 이르렀으며 2020년 말에는 경형 플러그인 자동차의 누적 판매량이 1000만 대를 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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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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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요리 꿔바로우하고 우리나라 탕수육하고 다른요리인가요? 아님 같은 요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먼저 탕수육은 바삭한 식감을 가지고 있는 반면 꿔바로우의 경우 탕수육에 비해 쫄깃한 식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꿔바로우가 탕수육에 비해 쫄깃한 이유는 전분가루와 더불어 찹쌀가루를 넣어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탕수육은 고기가 길쭉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꿔바로우는 넓적한 사각형 모임입니다 만드는 방법은 비슷한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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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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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이들이 처음 악기를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박자의 개념을 오감으로 느끼고 체험하게 하여 나중에는 그 박자의 개념을 악보를 보기만 해도 받아들여서 바이올린으로 켜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체 활동과 노래 부르기 그림과 말 리듬으로 각 박자 4분음표 2분음표 8분음표를 연상하게 놀이로서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할 줄 알고 참여하게 되는데 놀이를 통한 교육이어야 아이들의 자발성을 끌어내어 바이올린뿐 아니라 나중에 다른 공부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보를 읽는 것을 배우는 방법도 모든 악기를 배울 때마다 그 악기의 특성에 맞춰서 접근해야 합니다 바이올린을 가리키는 선생은 바이올린을 잘 켜게 하고 아이 스스로 악보를 잘 보게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이올린은 현이 네 줄이지만 바이올린 기초 때 배우기 시작하는 악보들을 보면 A선과 E선 두 줄을 먼저 익힙니다 음악 이론이나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이올린을 배울 때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익히게 되면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처음 배울 때 A선 E선조차 계이름으로 알려 주지 않고 아빠 줄 엄마 줄로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바이올린의 두 줄로만 익힐 때 음계가 C 메이저가 아니라 A메이저인데 A메이저에는 #이 세 개나 붙습니다 C 메이저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와 다르게 에이 메이지에는 라시도 레미파솔이라는 음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배우는 아이들에게 #이 붙은 제대로 된 음계를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가르치다 보면 나중에 오히려 악보를 잘 못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계이름부터 가르치지 않고 바이올린을 처음 배울 때 중요한 것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이올린 기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세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 바이올린의 불필요한 근육을 너무 많이 사용하게 배우면 나중까지 너무 많은 힘과 노력으로 바이올린을 켜게 되기 때문에 필요 없는 근육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교정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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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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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는 어떤 화풍을 따랐고 어떤 작품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나 1806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입니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사능 호는 단원 이며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 단원을 따온 이름입니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지고 그는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였지만 고사인물화 및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주로 어명, 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림만 그린것이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 유목'이라는 문집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출생 등은 알려진 바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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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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