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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맞나요, 도스토예프스키가 맞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언어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둘다 맞다는 어설픈 답변보단 국립 국어원에서 정보를 검색하여 답변 드리겠습니다.외래어 표기법중 러시아어 표기와 관련된 답변이 있어 옮겨 적어 드립니다.'Dostoevskii'는 러시아어 표기법에 따라 '도스토옙스키'로 적습니다. 외래어 표기법 표기 세칙 제1 항에서 "파열음과 마찰음 f(ф)·v(в)는 무성 자음 앞에서는 앞 음절의 받침으로 적고, 유성 자음 앞에서는 ‘으'를 붙여 적는다."라고 밝힌 것에 따라 'v'를 앞 음절의 받침 'ㅂ'으로 적은 것입니다. 이를 '도스토예프스키'로 적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224854&pageIndex=1링크 남겨드립니다.답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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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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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라는 말의 어원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돈의 어원, 돈은 돌다에서 왔다고 알고 있었는데 설명이 부족한거 같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돈’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에 관련된 어원설은 다양하다. 민간에서는 오래전부터 ‘돈’의 어원을 ‘돌다[回]’에서 온 것 또는 한자 ‘동(銅)’과 ‘은(銀)’이 합음(合音)된 것 등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들 설은 그야말로 민간어원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돈’이 칼을 뜻하는 ‘刀’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 말까지 ‘錢’과 ‘刀’는 화폐를 의미하는 뜻으로 나란히 쓰였고, 소리도 ‘도’와 ‘돈’으로 같이 쓰이다가 조선시대에 한글이 창제된 뒤 ‘돈’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刀’가 무게의 단위 ‘돈쭝(1돈쭝은 한 돈쯤 되는 무게)’으로 변용되어 ‘도’가 ‘돈’으로 와전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돈’은 한 사람이 많이 가지게 되면 칼의 화를 입기 때문에 그것을 훈계하기 위해 ‘돈’을 ‘刀’라 하고 그것을 ‘돈’으로 읽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고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명도전(明刀錢)과 같은 화폐가 칼 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이 이 설명의 증거 자료로 제시된다. 그러나 ‘刀’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도’가 ‘돈’으로 바뀐 이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https://opendict.korean.go.kr/dictionary/view?sense_no=404089> 링크 남겨드립니다.돌다와 칼에서 왔다는 설은 있으나 문서화되어 돈에대해 언급되어 있는 정확한 어원은 없다 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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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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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로 양복을 입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로 양복을 입은 사람은 사실 기록으로 찾아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는데자료를 찾다보니 기록이 있었습니다.구한말 개화파 정치가 서광범 님으로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해외를 방문했었는데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 양복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일본 요코하마 양복점에서 30달러짜리 양복을 구입하였는데 이게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이라고 합니다.답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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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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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왕들의 어진을 그린것이 왜 남아있지않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아시다시피 초상화 라는거 자체가 임금 이외에는 제작을 엄격히 금지할 정도로초상화를 제작하는거 자체를 금기시하고 왕의 어진은 국가사업으로 추진될 정도로 중요했습니다.초상화가 대상을 신격화 할수 있어 제작을 하더라도 아무나 볼수 없게 관리를 하였습니다.그런 임금의 어진을 많이 찾아볼수 없는 이유는 예상하셨겠지만 대부분 소실 되었기 때문입니다.조선전기의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거의 불에 타버렸고조선후기의 어진은 한국전쟁당시에 거의 소실되었습니다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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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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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작품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해설을 맡고 있는 김찬우 라고 합니다.해당 작품은 아시다시피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란 작품으로문학, 영화, 드라마 등 많은곳에서 차용 등을 통해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작품 입니다.현재 네델란드 마우리츠하위스 에 소장되어 있습니다.전시를 해설하는 입장이다보니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해당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되나요?''작가는 왜 이작품을 그렸나요?'조금 기대와 다른 대답일지 모르지만작가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적어놓는 공간을 '작가노트' 라고 하는데작가노트에 작가가 직접 작품에 대해 적어놓지 않으면 우리는 그 작품에 대해시대상황, 작가의 성향 등을 대입해서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사실 베르메르는 고흐와 마찬가지로 생전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고17세기의 작가인데 생후 19세기가 되어서야 인정을 받고 작품 역시 인기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당시 작가노트가 없으므로 작가의 의도를 알수 없다 라는게 정답이며여기에 이것저것 해석을 붙이는건 사족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답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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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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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라는 나라가 존재한게 맞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야는 삼국시대 초중방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여러국가의 총칭으로 불리 나라 입니다.금관가야, 대가야 등이 있었습니다.삼국유사,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책에 가야대한 기록이 있으므로실존했던 나라가 맞습니다현재 남아있는 역사적인 유물도 많이있습니다.그럼 답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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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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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한국에서 특히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인기가 많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추운겨울에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먹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아마 아아가 한국에서 유행한건 한국인의 성향과 맞아서 라고 생각됩니다.빨리빨리, 효율을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 뜨거워서 빨리 마시기 어려운 뜨거운 아메리카노보다냉명과 같은 차가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가 인기가 많아졌을거라 생각됩니다.그럼 답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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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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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닝 크루거 효과'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더닝 크루거 효과란인지 편향의 하나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과잉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반면,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실력을 과소 평가하여 열등감을 가지게 되는 효과를 말합니다.식이 조금밖에 없을 때 오히려 자신감이 높게 치솟아 가고그리고 지식이 쌓일수록 자신감이 하락하며, 실제 역량보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구간을 지나면 그제야 조금씩 자신감이 오르는깨달음의 오르막을 지나 전문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아마 스스로 이런경험 해보시지 않으셨을까요?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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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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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부자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해당 벼락부자, 졸부의 의미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단어 입니다.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나라로써는 사회문화의 많은 곳에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고자신도 모르게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일본뿐 아니라 전세계, 특히나 인접국은 서로 많은 문화를 교류하고 영향을 받아왔기에그것이 나쁜것은 아닙니다.졸부, 벼락부자란 단어는 일본의 장기를 통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혹시 체스를 해보셨으면 폰 이란 가장 기본적이고 약한 말이 상대편 진영의 마지막열에 도달하면승급하여 퀸이나 룩 같은 다른 말로 승급할 수 있는걸 아시나요?역시나 일본 장기에서도 이러한 룰이 있는데 일본장기의 졸이 적진에 들어가면金将이란 장교로 승격되어 행동범위가 6배나 넓어집니다.이 규칙을 나리킨 成金 이라 하는데 이걸 일본에 졸부, 벼락부자 로 부르고 있는데이것이 일제강점기때 한국에서 사용되며 한국에서도 널리 인지되고 사용된 것이다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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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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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항상 침략만 당했던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조선에서 먼저 공격을 한 경우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 전문은 아니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시대에 먼저 공격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하단에 내용을 첨부드리겠습니다.첫번째 대외 정벌 사례는 ‘대마도 정벌’이다.왜구는 삼국시대부터 밀무역, 약탈 행위 등으로 줄기차게 한반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은 왜구들은 한반도와 중국 동남해안 지역을 누비며 끈덕지게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다. 고려시대 말에는 일본인 해적 집단이 아예 한반도에 집단적으로 창궐하기도 했다.조선 왕조가 세워진 뒤에도 왜구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결국 세종은 1419년 대마도 정벌작전을 시작했다. 그해 6월19일에 1만7000여명의 원정 토벌군이 전투용 함선 227척에 나눠 타고 대마도로 쳐들어갔다.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편성해 작전을 수행한 능동적 출병이었다. 이튿날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 토벌군은 왜구 선박 140여척을 나포하고 가옥 2000여호 등을 모조리 불태웠다. 아울러 왜구의 우두머리 114명을 사살하고, 왜구 다수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결국 왜구의 우두머리 격인 대마도 도주는 조선에 항복 문서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다. 조선 조정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켜 조선의 영토로 삼았다.저자들은 “조선군의 적극적 태세, 신속한 대응이 왜구의 침입 의도를 근본적으로 종식시키는 성과를 이끌어냈다”며 “신흥국 조선이 외부의 불안요소를 제거해 통치체제를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게 했다”고 평가했다.두 번째 대외 정벌은 ‘보주강 여진족 원정 토벌’이다. 세종이 즉위할 당시 함경도와 서북 압록강 연안 일대는 ‘야인들의 사냥터’였다. 압록강 지류인 보주강 유역과 지금의 회령 일대에서는 여진 부족들이 조선인 부락을 습격해 약탈을 일삼고 조선인들을 납치하는 일이 잦았다. 조선 조정은 큰 골머리를 앓았고, 세종은 심사숙고 끝에 1432년과 1437년 두 차례에 걸쳐 압록강 도하작전을 단행한다. 조선군의 기습적인 토벌작전 결과 여진족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압록강 연안지대는 평온을 되찾았다. 세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변방 행정구역을 네 군데 설치하고 이들 지역의 전략촌들을 연결하는 행성을 쌓아 수비부대를 주둔시키고 백성들을 개척민으로 이주시켰다. 한반도 서북방 ‘사군 개척’이다. 세종은 또 김종서를 동북방 국토 개척의 임무를 맡겨 파견했고, 김종서는 7년 동안 육진 개척을 완수했다. 그러나 세종의 두 차례 도하작전은 여진족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박멸하지는 못했다. 이후 북방정책 의지는 퇴색했고, ‘소중화’ 의식에 빠져들게 된다. 저자들은 “그사이 여진족은 후금을 건국했고 후에 청나라를 세웠다”며 “정묘호란을 거쳐 조선은 후금을 ‘형님’으로 떠받들게 되었고, 병자호란 때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세 번째 대외 정벌은 헤이룽강 나선정벌이다. 17세기 후반 ‘나선’으로 불리는 제정러시아의 동진 세력이 청나라 헤이룽강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자 청나라 조정은 조선 측에 지원군 파병을 요구했다. 1차 나선정벌에서는 1654년 5월 조총수 100명이 두만강을 건너 청군 900여명과 합류해 제정러시아 무장원정대와 싸웠다. 조선군은 당시 승리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했고 조선군 조총 사격수의 전투 역량을 나라 안팎에 과시했다.<책. 조선의 대외정벌. 임홍빈 유재성 서인한 지음>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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