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 시기에는 왜 왕권이 그렇게 약해졌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세도정치는 보통 조선 후기의 정조 사후에 왕의 외척들이 정권을 잡은 시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도 정치 시기에 왕권이 약화된 이유는, 왕은 말 그대로 "형식 뿐인 왕"이기 때문입니다. 세도정치 시기의 가문들이 조선의 실제적인 지배자들이었으며, 그들이 마음에 안들면 왕도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의 무게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왕이 힘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기에, 실제적으로 충성하고 따르는 곳도 세도 가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도 정치 시기에는 왕권이 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세도정치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으로는 정조의 사후로 들 수 있는데, 영조-정조 시기는 당파들끼리 싸움이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당파 싸움을 중재하려 하였는데, 정조는 왕권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외척과 손을 잡는 결정을 합니다. 그것이 안동 김씨 가문이었고, 안동 김씨 가문의 힘과 자신의 왕권을 합쳐 다른 당파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정조의 의도는 외척과 함께 왕권을 강화 시켜 당파의 힘을 약화시킨 후에 강해진 외척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안정화시킬 목적이었으나, 그렇게 하기 전에 죽게 되면서 강해진 외척의 힘만 남게 됩니다. 정조의 아들이었던 순조는 너무 어렸기에 외척을 견제할 순 없었고, 이후 외척이 중심이 되는 세도정치 시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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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왜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정도전은 유학자입니다. 유학에서의 근본은 인으로, 결국 사람 중심의 학문이기도 합니다. 정도전의 정치 철학은 특히 민본주의적인 정치 철학으로, "왕"중심의 사회가 아닌 "백성" 중심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건 조선에서는 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하들의 권한이 왕의 권한보다 높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정도전의 생각에서는 왕권이 너무 강해지면 백성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으며(폭군의 등장) 그렇기에 재상이 중심이 되어 민생을 살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재상이 옳지 못하면 그때 왕이 재상을 내치는게,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구요.이방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왕가를 그저 바지사장 정도로 생각하는 정도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왕자의 난으로 세력을 키운 이방원은 유학자인 정도전이 보았을때 형제들을 죽인 살인자로 밖에 보이지 않기에, 정도전과는 엮일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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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미래에는 가난한 사람이 더욱더 성공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 갈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가장 큰 단점 중에 하나가 양극화이기에, 현대 사회에서는 양극화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것 처럼 "돈이 돈을 부른다"고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사람은 그 부를 더 크게 늘리기에 없는 사람보다는 더 쉽게 불릴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는 돈 만큼 중요한 것이 정보인데, 결국 돈이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정보도 쉽게 모을 수 있으니까요.이전에는 지식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거나, 자신의 기술을 통하여 부를 늘리는 방식이 가능하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전문가"가 돈이 있다고 모두가 되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점점 기술적으로 발전하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영역이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ai를 통해서 영상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온 것 처럼, 돈과 정보량이 많은 사람이 더 쉽게 돈을 버는 구조가 되가고 있습니다.그러기에 가난한 사람이 성공하기에는 이전보다 더 어려워 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만큼 사회가 더 많이 변화하기도 하기에, 변화하는 흐름을 타는 능력을 기르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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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 드라마에 나오는 다모라는 직업이.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다모(茶母)는 원래는 식사나 차를 대접하는 관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숙종대의 기록에서 필요에 따라 포도청 산하에서 수사를 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주로 남자들이 가지 못하는 규방과 같은 곳에서 사대부들을 은밀히 내사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수사에 동원되었는지 알려지진 않았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여경 또는 스파이와 같은 느낌으로 볼 수 있습니다.문의주신 선발 조건에서는 체력을 보았다고 하는데, 쌀 40kg 정도를 들어올릴 수 있어야 하고 막걸리 5사발을 마실수 있어야 하며, 무술에 대해서도 심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막걸리의 경우 술에 취하지 않고 정보를 빼내야 해서 확인하였다는 설과 술에 취하지 않는 걸 과거에는 건장함으로 생각하였기에 기준에 있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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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인물과 대화가 가능해진다면?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당시의 사고방식 뿐만 아니라 그 인물 자체와 대화가 가능해진다면, 사료로 해석하는 역사에서 대화로 확정하는 역사로 변화할 것 같습니다.'역사'는 확실한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역사가가 과거의 사료들을 토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배우는게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같은 역사적 사실에도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으며, 다른 역사관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인물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게 된다면, 역사적 사료를 해석할 필요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는지 무슨 이유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역사 연구의 방향도 사료에 대한 연구가 아닌, 확실한 정보를 기록하고 연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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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어떻게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칠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귀주대첩은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귀주성 앞 평원에서 서로 싸운 전투입니다. 당시 두 진영은 모두 강을 등지고 싸우는 배수의 진을 쳤었으며, 서로 장기전으로 싸우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고려 김종현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가 합류하며 거란군을 기습하였고, 바람의 방향도 바뀌어 고려군->거란군쪽으로 불게 되어 기병대도 탄력을 받고 거란군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거란군은 강쪽으로 밀려나게 되고, 이로 인해서 앞쪽의 고려군의 공격 + 밀려나다 강에 빠져 죽음 으로 거란군은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흔히 알려져 있는 것 처럼 고려군이 수공으로 승리하였다고 한 내용은 잘못 알려진 내용이며, 군사의 수준도 둘이 비슷하거나 고려군이 더 많았습니다. 다만 대첩으로 불릴 정도로 고려 전쟁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거의 손실이 없이 거란군을 괴멸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전투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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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틀랜드 전쟁은 어떤 내용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포클랜드 제도는 지리학적으로는 아르헨티나의 우측에 있는 섬들의 집합체로, 최초에는 무인도였습니다. 이후 유럽에서 식민지 개척 시대에 프랑스, 스페인, 영국이 크고 작게 충돌이 있다가 결국에는 영국이 최종 점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관리가 어려워 지자 영유권만 표시하는 명판만 남겨두고 철수하게 되었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은 [리오데라플라타 합중국]이라는 국가를 만들게 됩니다. 포클랜드는 이때 당시에도 한동안 무인도로 남아있게 되었지만, 포클랜드 지역의 담당관을 임명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를 알게된 영국 정부가 다시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 영국 이주민들이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이후 탈식민지화라는 국제적인 흐름이 변화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정부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영국측의 반환 거부와 포클랜드 주민들의 아르헨티나 귀속을 반대하면서 영유권에 대한 협상은 모두 결렬되었고, 1982년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정권에 의하여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현재까지도 영국의 영토로 자리잡혀 있습니다.아르헨티나의 주장은 원래 아르헨티나와 가장 가까운 영토였고, 무인도였지만 영국이 불법으로 점령한 것이다 입니다. 영국측의 주장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를 개척하여 점령하였고, 실효적으로 지배한 것도 영국이기에 영국 영토이다 입니다. 사실 양쪽 모두 주장에 일리는 있으나, 국제법상으로 보았을 때는 영국쪽이 좀 더 유리한 상황입니다. 포클랜드 주민들도 아르헨티나와 합쳐지길 원하지 않고 있구요. 최근 아르헨티나의 반환 요구가 더 커진 것 중에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클랜드 유역의 유전을 탐사중에 있어, 석유가 나오기 전에 미리 반환받고 싶어서 요구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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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는 왜 갑골문으로 점을 치는 문화를 발전시켰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대 상나라 시대는 기원전 17세기~10세기 경의 나라로, 정확하게 파악하긴 어렵지만 고대시대의 국가였습니다. 즉 고대 사회의 특징인 제정일치(종교와 지도자 같은) 사회의 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고대 상나라는 특히 강력한 신정일치 사회로, 국가의 지도자가 신관의 역할도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대소사에 관련하여 점쾌는 반드시 필요한 필수 요소였으며, 그것이 상나라에서는 갑골문을 통한 점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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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일방과 오대세가와 관련하여 실제 실존하던게 잇엇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무협에서 클리세로 자리잡은 허구적인 집단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소림사와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단체들도 있지만, 무협 소설과 실제의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약간의 모티브를 삼아서 창작을 한 허구의 단체이다 정도로 생각해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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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전문가도 챗지피티를 이용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사주팔자는 명리학과 관련이 깊습니다. 단순한 점쾌가 아닌 엄연한 학문적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 있기에, 쳇GPT를 활용하면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쳇GPT 자체가 완벽하지 않기에, 기본적으로 사주에 대해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정도로만 활용하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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