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의 객관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우면서 가장 처음 배웠던 책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역사"의 정의에 대하여 깊게 담론하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문의주신 역사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저자인 E.H.카에 의하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즉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결국 기록되어야 역사로 볼 수 있기에, 기록하는 역사가의 관점이 무조건적으로 반영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역사 서술에서 모든것을 빼고 객관적인 기록만 적어둘 순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의 관점이나 시대에 대한 통찰 없이 단순 기록으로써는 역사로 보기도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결국 과거를 돌이켜봄으로써 현재를 통찰하고, 더욱 진보하기 위하여 그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현재 역사가의 담론이 합쳐졌을때 비로소 역사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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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사출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사출도는 부여의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초기 부여는 부족끼리의 연맹 국가였으며, 이때 당시 대표 부족이 4개 부족이 있었습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로 불리는 이 4부족이 중심이된 연맹체가 부여였습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는 모두 가축 이름입니다.) 이 부족들이 지방에 눌러 앉게 되면서 행정구역화 되었고, 수도를 중심으로 4방향으로 뻗어나간다고 하여 사출도란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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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세종의 권력을 위해서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태종은 3남이었던 세종을 세자로 책봉한 후, 자신의 왕권으로 세종의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가장 첫번째로 한 것은 태종이 직접 한 선위 쇼였습니다. 본인의 왕권을 세자인 세종에게 물려준다는 선위 선언을 지속적으로 하였는데, 이를 제대로 반대하지 않는 신하는 자신, 또는 왕권에 대해여 역심을 품고 있다고 해석하여 숙청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견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후 실제로 자신의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 선왕으로 사후까지 4년간 세종의 뒤에서 신하들을 견제하였습니다. 피의 숙청으로 유명했던 태종이 살아있는데, 세종의 왕권에 도전할 신하가 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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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는 우리나라 경제는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80년대에 우리나라가 잘 살았다고 하는건 그 당시 경제성장률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경제성장률이 평균 10~12%정도가 되었기에, 80년대만 통틀어 본다면 전체적인 성장률은 지금과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0년대는 평균 1~2%정도 성장하였으니, 약 10배정도 차이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직장인들의 임금도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올라갔고,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지하철과 도로, 도시들이 급격하게 개발되어 70년대와 80년대는 말도 안되게 발전하였다고 느껴졌을 것입니다.지금보다 잘 살았다라고 말하기에는 경제적인 총량으로 비교한다면 당연히 지금이 더 경제력의 총량은 높겠지만, 당시 성장률은 지금과는 다르게 빠르게 성장하였기에 체감으로 느껴지는 "전보다 훨씬 잘 살아졌다"는 느낌이 와닿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반찬으로 김치랑 나물만 먹다가 다음달에 고기반찬, 그 다음달엔 반찬이 10가지가 나오니 "아 우리 잘사는구나" 하고 느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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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통일을 한 후 고구려, 백제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부분의 백제와 고구려 왕족은 당나라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일부 왕족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습니다.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은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되었으나 그곳에서 인정을 받고 당나라의 관리로써 활동합니다. 그러면서 당나라의 백제땅 점령을 위한 장수로 임명되어 자신의 고향 영토에서 일어나는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웅진도독부의 도독까지 임명됩니다. 하지만 신라와 당나라간의 나당전쟁이 발발하고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점령하면서 당나라로 도망, 남은 여생은 당나라에서 보내게 됩니다.고구려의 왕족 중 한명이었던 안승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승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이끌었으나 끝내 패배하고, 신라로 투항하게 됩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안승에게 금마저(지금의 익산쯤 됩니다.) 지역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그를 왕으로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당시 왕이었던 문무왕의 조카딸과 혼인을 하였고 고구려 유민들이 어느정도 안정된 후 보덕국을 해체, 안승은 신라의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어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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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니즘과 유대교는 서로 다른 입장이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시오니즘은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이전 고향 땅인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민족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이름 자체도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언덕에서 따오기도 하였구요. 그러나 시오니즘을 처음 주장한 시오니즘의 아버지인 테오도르 헤이츨 자체가 무신론자였습니다. 시오니즘을 주창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이었습니다. 시오니즘은 종교적인 운동이라기보단 유대인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입장이 다르다기 보단, 어디에서 살던 유대교의 교리대로 살면 상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와 실제 생활을 구분하여 생각하였기에, 시오니즘과 유대교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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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없는 미래 사회는 과연 가능한 걸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전쟁이 없는 유토피아적인 사회는 아마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전쟁이 이루어 지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소유의 개념이 없다면 당연히 분쟁도 없겠지만, 모두 동등하게 소유하고 모두 동등하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플라톤이 언급하였던 고대 유토피아 세계 조차도, 현실의 모순을 부정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였던 사회주의 유토피아도 결국에는 실패한 이론으로 알려져 있구요. 인간사회가 점점 더 발전함에 따라, 소유에 대한 부분은 더욱 심화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전쟁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정보전쟁도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하물며 동물들 끼리도 자신들의 영토나 음식 때문에 싸우고 있기에, 전쟁이 없는 삶 보다는 전쟁을 억제시킬 수 있는 것을 바라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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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려청자는는 10~14세기 고려시대 전성기를 이룬 도자기로, 옥색(비취색)의 색감을 띄고 있습니다. 이런 색이 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용하였던 흙이 철분이 포함된 흙을 사용하고 바르는 유약 또한 철 성분이 포함 되어 있어 구워낼 때 청록색을 띄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삼강기법을 통해서 섬세한 세공을 하였기에 우아하고 귀족적인 느낌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느낌의 도자기가 유행하였던 것은 고려시대가 귀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화려하고 정교한 도자기를 많이 선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반대로 조선 백자는 깨끗한 흰색이 대표적이며, 다양한 무늬를 넣기 보다는 단순하거나 절제된 무늬나 장식이 특징입니다. 백자는 구울 때 백토를 사용하기에 철 성분이 없고, 사용하는 유약도 투명 유약을 사용하기에 깨끗한 백색으로 구워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자가 조선시대 유행하였던 것은 선비 중심의 유교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청백리" 라고도 하는 선비의 검소하고 절제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기에, 유행하는 도자기도 검소함을 강조하다보니 백자가 더 유행하게 되었습니다.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이렇게 변화한 것도 있지만,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도자기의 기술력이 많이 소실되었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은 한편으론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리었는데, 임진왜란 시기에 많은 도공들이 일본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히데요시가 조선의 도자기를 좋아해, 전략적으로 잡아들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도자기 기술력이 많이 소실되었고, 반대로 일본의 도자기 기술력은 상당이 발전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아리타 지방의 아리타 도자기나 사쓰마 도자기 등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청자와 같은 도자기는 더 세심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문 도공이 많이 없어진 조선에서는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덜 필요한 백자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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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 때 혜경궁 홍씨 집안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혜경궁 홍씨 집안이 사도세자를 구하지 않은 이유는 질문 주신 것 처럼 홍봉한이 노론의 핵심 인사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 노론은 영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명령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조의 주장을 같이 밀어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사도세자를 지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영조 때문으로 알려져 있긴 하나 사도세자가 실제로 광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지키려고 앞으로 나섰다가 오히려 홍씨 가문이 더 위험해 질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나가면 세손이었던 정조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선택으로 사도세자가 아닌 세손 정조를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영조와 뜻을 같이 했다고 보여집니다.이러한 이야기에 대하여 혜경궁 홍씨의 자서전인 한중록에는 세자가 실제로 미쳐있었고,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두려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자를 감싸면 자신과 모두가 죽을 수 있었고 정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여 써놓은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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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불교와 기독교는 동/서양의 대표 종교인 만큼 서로 다르면서도 어느 부분에선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불교의 핵심 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사성제는 인간사를 바라보는 진리로, "인간은 모두 고통을 받는다. 이 고통은 욕심에서 오는 것이며 욕심을 없애면 고통도 없어진다.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 이라는게 팔정도로, 8가지 수행의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8가지 수행은 (정견-올바른 이해 / 정사유 - 올바른 생각 / 정어 - 올바른 말 / 정업 - 올바른 행동 / 정명 - 올바른 직업 / 정정진 - 올바른 노략 / 정념 - 올바른 마음가짐 / 정정 - 올바른 집중)입니다. 이 팔정도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고, 이렇게 고통에 벗어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보살)이 된다는 교리입니다.기독교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전지전능의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고 창세기에 나와있는 인간의 원죄가 인간 삶의 근본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자 예수님의 구원으로, 이런 구원은 하나의 행위라기 보단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즉 기독교의 최종 목표는 예수를 통한 구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고, 이를 통해 천국으로 가는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불교의 중심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는 절대적인 창조신의 존재를 따로 믿지 않습니다. 본인의 수행과 깨달음을 중요시하며, 신이 정해주고 구원하는게 아닌 본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믿으며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불교는 인간사의 고통을 인간 본인이 가진 욕망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기독교와는 다르게 이를 해결하는 것도 본인한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죄는 태초부터 존재하는 원죄이며, 이러한 원죄의 해결도 결국 예수님의 구원에 의해서만 이루어 진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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