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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정한론의 과정에 어떠했나요?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한반도에 대한 침략 의도는 항상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정한론의 전개 과정에 대해 궁금합니다.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정한론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과의 수교 과정에서 서계 문제로 불가지게 됩니다. 1873년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과 초슈번 출신 강경파 등이 내부 불만과 조선의 무례를 이유로 정한론을 주장했습니다. 일본은 탈아론을 바탕으로 서구 열강처럼 제국주의 국가화하며, 국가 부흥을 위해 조선 정부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정부 정책화하였습니다. 강화도 조약으로 정한론이 실패하자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도한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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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택된 답변
  •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이 대두되게 된 최초의 이유는 1868년에 일어났던 국서 거부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외교의 방식도 서구적으로 변경하였는데, 기존의 쇼군으로 부터 오는 국서가 아닌 천황이 직접 발신하는 방식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언뜻 보면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이나,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일본과의 외교도 쓰시마 도주를 통해서 진행해온 터라 일본이 직접 "천황(황제)"를 칭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국서를 그대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와 조선 정부는 외교적으로 큰 마찰이 생기게 됩니다.

    이후 일본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정한론을 주제로 대립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메이지 6년 정변입니다. 당시 정한론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라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있었고, 반대파로는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 등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정한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던 사람들은 사표를 내고 실각하게 되고, 이후 반정부 세력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도 정한론자로 보기도 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을 정벌한다기 보다는 "같이 근대화 하여 일본과 같아져야 한다"를 처음에 주장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고 나서, 조선에서의 근대화가 아닌 일본으로부터의 근대화로 노선을 바꾸면서 정한론자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