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유적지가 국가적으로 지정되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보통 유적지나 문화재가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는 건 문화재청의 심의가 필요합니다.1)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각각 1개 이상 있다고 보여지는 건축, 기록, 미술품 등의 유산을 등재 신청2) 문화재위원회의 해당 분야 문화재위원이나 전문위원 등 관계 전문가 3명 이상이 조사 보고서 제출3) 보물 지정 가치가 있다면 30일 이내에 관보에 예고4) 예고가 끝난 날로부터 6개월 안에 문화재 위원회 심의로 지정국보와 보물 지정 모두 위 절차로 진행되며, 그 가치가 보물보다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보여지면 국보로 지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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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먹여 달라는것은 언제부터 생겨 났나요?
안녕하세요.경사스러운 날에 국수를 먹는 풍습은 장수와 부부의 연이 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의미입니다. 길고 잘 끊어지지않는 국수를 먹음으로써 오래 살고, 또 헤어지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최초의 잔칫날 먹는 국수의 기록은 고려시대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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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육로를 개발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조선시대 육로를 아예 개발하지 않은건 아닙니다. 역참제도를 활용하여 많이 이용하는 길을 닦기도 하였습니다.하지만 수로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긴 하였습니다. 질문주신 것 처럼 육로보다 훨씬 실용적이었기 때문인데요, 우선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부분 산지가 많아 육로를 활용하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강줄기는 대부분 한강으로 이어지고 있고 3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어 강줄기와 바다를 이용한 수로를 많이 이용하였습니다.특히 세금을 징수할때 활용하였던 조운선이 대표적인 수로 활용이라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수레로 산을 타고 넘어야 옮길 수 있는 징수품을 커다란 배로 한번에 옮길 수 있어 많이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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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세와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입니다.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은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일본인의 치외법권일본인의 해안측량권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고 개항장 내 자유무역위 사항들이 있습니다.불평등 조약이었던 이유는 위의 치외법권으로 일본인은 조선의 법으로 처벌할 수 없었으며, 해안측량권으로 손쉽게 조선의 바다에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개항장 내 자유무역은 관세가 없다는 뜻으로 일본 자본의 조선 유입이 본격화되게 됩니다.질문주신 이후 무역에 끼친 영향으로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한다는 조항으로 청나라의 영향력을 축소시켰으며, 다른 외세들도 위 조항을 가지고 손쉽게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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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 몸에서 생기는 사리는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종교적 의미에서 사리는 수행의 결과로 비추어집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몸과 마음을 수행한 결과로 해석하며, 사리가 많이 나온다면 그만큼 많은 수행의 결과를 의미합니다. (아소카왕 전설에 따르면 부처님은 84,000개의 사리가 나왔다고 합니다.)과학적인 근거로는 많은 해석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고온에 의하여 몸안의 무기질과 뼛조각이 구슬형태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 사리의 성분을 분석하니 칼슘, 인, 규소와 같은 무기질 성분이었다고 합니다.또 다른 과학적인 주장으로는 채식과 좌식 생활을 많이하는 승려이기 때문에, 몸의 구성 성분도 일반인과는 다르게 화학작용을 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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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우리나라는 환관이 매우 많았는데요 그런데 유럽에서도 환관문화가 있었는가요
안녕하세요.중국의 환관이나 우리나라의 내시와 같은 거세한 사람이 왕을 보좌하는 세력은 아시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황제(왕)이 있는 궁안의 여자들 또한 황제의 것이었기 때문에, 상주하는 남자는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하지만 황제를 바로 옆에서 밀착 보좌하여 권력을 얻었고, 특히 황제가 급사하여 그 자식이 아직 어릴때 대신 통치를 하며 위세를 떨쳤었습니다.유럽에서는 하녀가 왕이나 황제의 여자를 뜻하진 않았기에 거세를 할 필요는 없었고, 비슷한 위치와 권력으로 시종장이나 고문이 존재했었습니다. 이들은 귀족출신이 많았기에 왕의 총애를 받으면 위세가 대단했었습니다.*특별한 경우로 비잔틴 제국에는 거세한 내시가 존재했으며,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이 권력을 잡았을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주로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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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역사적 배경이나 중요한 사건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사건은 무신정편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무신정변 이전 고려는 옛 호족세력이 왕가와 혼인으로 엮이며 형성된 문벌귀족 중심의 국가였습니다. 음서제와 귀족끼리 혼인으로 귀족세력을 공고히했으며, 주요 지배계층으로써 군림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무신정변 이후 문벌귀족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이후 지배세력은 무신-친원파-신진사대부등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고려는 외부로부터도 많은 영향이 있었지만, 내부의 지배계층이 계속 변화하면서 정치적으로나 나라 내정상으로도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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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해적이라는 평이 있는데 실제로 어떤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나요?
안녕하세요.장보고는 통일신라 시대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시 해상 무역을 장악한 무역의 중개자였습니다. 청해진은 통일신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세워졌으며, 그 역할은 민간 무역선과 해상 신라인을 보호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해적이라는 평가는 "민간 무장 세력이 해상 무역을 독점하였다"를 가지고 해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국가의 승인을 받아 설치하였고, 오히려 주위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 치안을 유지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해적이라고 평가하기 보다는 국가에서 승인을 해준 "해상 민간 경찰"+"중개 무역 세력"으로 보는게 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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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마이산 탑사의 탄생 이야기는??
안녕하세요.진안 마이산 탑사는 1910년경에 이갑용이라는 수행자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이산에서 생식을 하며 수행하던 이갑용이 꿈에서 계시를 받고 돌탑을 쌓아 지금의 형태까지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손으로 쌓은 돌탑인데도 불구하고 폭풍이나 태풍에 무너졌다는 기록이 없으며, 마이산 자체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신비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돌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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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홍 머리는 좀 웃긴데 중국 머리가 그때 웃긴머리가 유행이었나여?
안녕하세요. 황비홍 만화에 나오는 머리는 변발로, 만주족의 고유 머리 스타일이었습니다. 황비홍 영화는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청나라가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황비홍에 나오는 중국인들은 모두 변발로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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