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했던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당시 조선말 동아시아의 상황과 같이 고려해 보았을 때, 열강과의 통상을 침략으로 판단한 정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1. 이전부터 조선은 쇄국정책의 기조였다.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거나 통상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정조 시대에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호가 부산에 도착하거나, 네덜란드의 상헌 드혼드 호가 조선에 정박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의 조선 조정은 서양과 수교를 하기보다는 무력으로 체포를 시도하거나 빨리 돌려보내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이후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과 청나라의 충돌을 보았고, 이외에도 천주교 전파로 인한 조선 내 천주교 신자의 등장은 양반제를 위협하기에 서양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정부는 서양과 통상 수교를 진행하기 보단 멀리 하려고 하였습니다.2. 병인양요, 신미양요 사건흥선대원군 시기에 쇄국정책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 시기의 가장 큰 사건으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었으며, 이는 서양 열강과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로 조선 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나 병인양요 이후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하였기에 흥선대원군 본인에게는 서양인은 상종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3.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흥선대원군은 당시 조선의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정통적인 가치 안에서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습니다.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당시 부패의 원인이었던 서원을 철폐하는 등 많은 개혁을 진행 중인 흥선대원군이었기에, 서구 열강과의 수교는 변수가 많은 것으로 판단되었을 수 있습니다. 조선 내부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과의 수교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전통의 가치관 안에서 진행하였기에, 이런 방향성을 읽고 싶지 않은 흥선대원군의 판단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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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어록에 관해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신채호 선생의 어록으로 알려져 있고, 서구권에서는 처칠이 한 말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신채호 선생의 저서이나 처칠의 연설에서 같은 표현은 찾을 수 없습니다.영국의 작가였던 나이젤 리스가 만든 용어 중 "처칠리언 드리프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멋진 문구가 시간이 지나면 유명한 사람이 했다고 믿게 되는 현상입니다. 서구권에서는 특히 처칠에 대해서 이러한 현상이 많아 처칠리언 드리프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도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실제로 2010년에 한일전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서 위의 문구를 응원문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보도기사를 보면 신채소 선생의 발언이라 소개 되지 않고, 응원 문구 정도로만 보도되었습니다. 이후 2013년 무한도전 역사 특강 시리즈에 신채호 선생의 발언이라 자막이 나가고 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채호 선생의 발언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역사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셨던 신채호 선생과 위 명언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렇게 굳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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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실제로 흐르는가 아니면 인간이 인식하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한가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역사적인 이야기보단, 사상이나 철학과 관련된 이야기 같습니다.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는 나뉘어져 있으며 이어져 있습니다. 역사학도라면 가장 처음에 배우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구절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고, 이는 곧 미래의 결과로 이어질 것 입니다. 그렇기에 역사학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배우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꼭 배워야 하는 필수 학문입니다.질문해 주신 관점을 역사학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에 의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나뉘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과 해석으로 역사가 기록되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으로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는 것은 다차원의 해석으로 생각되는데, 현 시점에서는 인간이 감지하고 작용할 수 있는 3차원의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미래를 나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인류가 다른 차원을 인지하고 간섭할 수 있게 된다면, 정의가 새로 바뀌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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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한일협약 체결 이후 파견된 메가타는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제 1차 한일 협약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 협약입니다. 일제에서 파견한 외국인 고문이 대한제국의 재정이나 외교에 간섭을 할 수 있는 내용이였습니다.메가타는 당시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일본인으로, 하버드 유학생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재정고문으로 있으면서 '화폐정리사업'을 주도하여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일제가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오래된 대한제국의 백동화를 일본 화폐로 바꿔주는 화폐정리사업은 겉으로는 최신 화폐로 교환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백동화의 질에 따라 교환비의 차등을 두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자본가는 엄청난 손해를 보고, 일본인 자본가는 미리 알고 대비하여 손해를 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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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왜 발해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려의 시작은 한반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당시 발해의 영토는 중국과 북쪽 유목민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고려는 궁예의 후고구려를 흡수하며 건국되었고, 후삼국을 통일하며 한반도에 통일 왕조를 건국하였습니다. 이 후삼국의 나라들 자체가 신라의 영토가 분리되어 건국된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통일 했을땐 통일 신라의 영토로 시작하게 된 것이죠.이후 고려의 후대 왕들이 북쪽으로 영토를 계속 넓히려고 군사행동을 하였고 실제로 영토를 넓히기도 하였지만 발해의 영토까진 넓히지 못했습니다. 이는 옛 발해의 영토를 유목민 국가(몽골족, 여진족, 말갈족 등)들이 점령하고 있기에 영토 확장이 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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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느 정말로 역사에 존재하고 잇는게 맞나여?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삼국지는 실제로 역사에 존재하는 것 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건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씌여진 소설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삼국지의 실제 역사는 "정사"라고 불리며, 이 정사 기반의 인물과 사건을 가지고 원말명초 소설가였던 나관중이 작성한 소설이 "삼국지연의" 입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삼국지의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의 내용들이 많으며, 조금 과장되거나 특정 인물들의 편에서 쓰여져 있습니다. 삼국지를 읽어보면 유비가 주인공으로 묘사되어 나오는데, 이게 삼국지연의가 유비를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로 생각하여 씌여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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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 과 -대군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왕자의 호칭 중 '대군'과 '군'의 차이는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정실 부인의 아들은 대군, 후궁의 아들은 군으로 불리었습니다. 태종 집권 초기에 후궁의 아들이 대군이 된 기록이 있긴 하나, 이러한 기준이 정립되기 전에 정해진 것으로 보이고 정립된 이후에는 위 기준에 따라서 정해졌습니다.번외로 정실 부인의 딸은 공주, 후궁의 딸은 옹주라고 불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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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백성을 위해 한 일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연산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이전 연산군은 총명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딸을 사주하여 죽이고 위에 보고는 자살하였다고 한 군수를 직접 심문하여 타살을 밝혀내기도 하였고, 또 학문과 예술적으로도 조예가 깊은 왕이었다고 합니다. 왕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국조보감을 속편하기도 하는 등 학문적으로 다양한 일을 행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연산군의 광증에 대한 기록이 나온건 무오사화부터 시작이며, 폭발하게 된 계기는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갑자사화 이후로 보여집니다.태조, 세종 등의 시호는 왕의 사후 내려지는 시호이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는 따로 불리는 것 없이 조선의 왕으로 불리었습니다. 폐위 이후에도 시호는 따로 붙여지지 않았고 반정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왕에서 군으로 강등되면서 현재의 연산군으로 불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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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은 어쩌다 이른 나이가 생을 마감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문종의 사망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종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위 전부터 종기로 고생을 했었고, 이 종기가 즉위 이후에 심해져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후 평가에서 문종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였는데, 수양대군이 문종의 치료를 주도하였기에 일부러 종기를 악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뒷받침 할만한 기록은 없으나, 결국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기에 의혹이 생겨났습니다.)문종은 왕이 되기 전 세종때부터 대리청정으로 5년간 제왕 수업을 받았고, 즉위 후 요절했음에도 총명함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많았습니다. 흔히 알고 있는 장영실의 측우기 아이디어도 문종이 세자 때 나온 아이디어라고 알려져 있고, 백성을 구휼하는 사창제를 제도화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총명함 외에도 태종-세종-문종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왕권은 상당히 강력했기에 강력한 왕권과 총명함을 기반으로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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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 피스타치오의 날이라는데요. 왜 만들어졌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잘 모르는 이야기인데 흥미가 있어 찾아보고 답변드립니다.세계 피스타치오의 날은 매년 2/26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원더풀 피스타치오>가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피스타치오의 영양학적 가치를 홍보하면서 소비를 권장하기 위해 지정하였다고 하는데, 상업적인 홍보를 위하여 업체가 자체적으로 지정 후 홍보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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