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은 언제 어디서부터 유래했나요?
젓가락의 역사는 5000년전 중국에서 기원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초기에는 불을 이용한 요리를 집어 먹기 위해 젓가락을 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가장 오랜 기록으로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한, 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당시 젓가락이 언급됩니다. 한나라가 초를 칠 때 역이기가 6국의 왕을 봉해 봉건제를 부활하자고 제안하을 하자 장량은 유방이 밥을 먹던 젓가락을 뺏어 분지르며 질책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젓가락과 숫가락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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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영토가 최대였을때가 언제인가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을 때는 발해 시기입니다. 발해는 698년 건국되어 926년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북부,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최대 영토를 통치하였습니다. 발해의 선왕 시기에는 주변국에서 해동성국이라 불렀으며, 5경 15부 62주를 행정구역으로 하였습니다.발해의 영토는 35만 제곱킬로미터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1.5배에서 2배 가량넓었으며, 한반도 면적의 2.2배에서 2.8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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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쐐국정책이 나온이유와 실패이유?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 베이징 조약(1860)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통상을 요구하며 남하하자 심각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와 제휴가 실패하고 오히려 천주교 박해로 돌아섰습니다. 게다가 1866년 제널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이 일어나면서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이 확고히 되었습니다.결정적인것은 1868년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오페르트도굴사건으로 서양인에 대한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1871년 신민양요를 계기로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쇄국 의지를 표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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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권에서 칭기즈칸의 공포 악마의 대상에서 긍정적인 인물로 재평가를 한 시기와 배경이 무엇인가요?
과거 서구와 중동에서 칭기즈칸은 공포의 대상이며, 야만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로 20세기 후반에 들어 칭기즈칸에 대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지도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즉 천호제, 울루스 경영, 역참 등 효율적 통치 방식과 관리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서역인들의 우수성을 인식하여 색목인으로 우대하고,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수용하는 개방적 정책을 재조명되면서 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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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왜 이집트와 아프리카쪽은 정복전쟁을 하지 않았던걸까요?
몽골제국은 순식간에 세계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무한할 것같은 제국의 확대도 여러 이유로 그 동력이 멈춰 섰습니다. 그 이유는 대칸과 울루스 지배자 사이에서 권력을 놓고 갈등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1279년 남송 멸망 이후 베트남, 일본 원정 등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기마 전투의 한계와 마주했습니다. 또한 몽골의 교초의 남발, 라마교의 광신으로 인한 경제 파탄과 몽골인 제일주의 따라 비정복민의 반발이 점차 확대되어 갔기 때문에 지속적인 지배에 한계가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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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이집트가 환상으로 포장되었던 시기와 왜 환상을 가졌을까요?
과거 유럽에서 이집트을 환상으로 여긴 시기는 19세기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89-1801) 이후입니다. 나폴레옹은 원정 당시 학자들을 동반했는데, 그 연구 결과가 책(Description de l’Égypte)으로 출판되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이집트에 대한 환상과 흥미가 증가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집트의 신비로운 상징과 모티프는 유럽의 예술, 디자인, 건축 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집트 열풍(Egyptomania)"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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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화순 고인돌 유적지는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지 인가요?
우리나라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대략 2000~3000년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우리나라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많이 분포하며, 인류의 보편이고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 여겨 화순, 고창, 강화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호산 고인돌 유적(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에서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의 계곡 일대의 5Km 달하는 지역에 596개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 유적은 영상강 지류인 지석강 주변에 형성된 평야를 배경으로 청동기 시대인 3000년에서 2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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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죄인에게 먹이는 사약은 어떤 재료로 만든 건가요?
조선시대 사약은 주로 왕족이나 사대부들의 사형 집행할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약에 대한 정보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사약의 주요 재료로는 비소를 가공하여 만든 비상이 사용되었을 것을 추정됩니다. 또한 독성이 있는 부자를 비상과 함께 조제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또한 생금, 생청, 게의 알 등을 함께 사용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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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어떤 외교전략을 펼쳤나요?
광해군은 누르하치가 1616년 여진족을 통일하고 수립한 후금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명을 배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금은 명과 대립 중에서 있었기 때문에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 외교를 통해 실리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명나라는 후금과 대립하면서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습니다. 도원수 강홍립(姜紅立)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었고,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毛文龍)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假島)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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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황제 푸이를 초대한 일본의 의도는 무엇이었나요?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국제연맹 등 강대국의 비난이 쇄도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1932년 3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접정(지도자)으로 하여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4년 만주제정을 세워 만주 제국이 되고 푸이를 황제로 즉위시켜습니다. 이는 일본의 괴뢰국지만 독립국가으로 포장하여 국제적 비난을 피해 보이려는 의도였습니다.게다가 일본은 1932년 푸이를 도쿄에 초대하여 성대하게 환영하여 더욱더 국제적 비난 시선을 피하고, 만주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술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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