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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먹고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약을 내리는 것을 자살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오히려 시신을 온전히 거둘 수 있어 선호헀습니다. 그러나 사약을 거부할 경우 강제로 먹이거나 교살 등 강제 집행을 하였습니다. 얘를들어 단종은 사사 대신 교살 당한 것으로 기록된 첫 번째 인물입니다. 다만 세조 당시에는 단종을 사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숙종실록에서야 비로소 "사약을 가져간 금부도사 왕방연이 말을 못 잇고 있자 영월 관아의 공생이 활줄을 풀어 목졸라 죽였다."는 언급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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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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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과 대전속록은 어떤 차이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전속록'은 성종 23년(1492)에 인쇄한 것으로 1484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포 이후에 내려진 수교(受敎)들을 모은 것입니다. '경국대전'의 편찬을 통해 조선의 법제가 큰 틀에서는 완성되었으나, 법전을 보완하는 수교가 지속적으로 내려졌고, 이러한 수교들을 정리하여 법전으로 편찬하려는 필요에 따라 완성된 법전입니다. 항목들은 '경국대전'에 준하여 설정되었으며, 대부분은 행정적인 실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규정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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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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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좌태자가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스이코 덴노가 당시 일본 최고의 사찰이었던 아스카데라를 완성하자 백제가 이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대표로 보낸 것입니다. 백제가 일관되게 국가적 위기때마다 태자를 보내 일본과의 외교를 강화하였습니다. 당시 백제는 성왕이 신라군의 기습으로 관산성에서 전사한 후 신라에 적개심이 심화된 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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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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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월드컵 출전은 언제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월드컵 본선 출전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입니다. 김용식 감독 등 22명의 선수단이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직행 노선이 없어서 태국 방콕을 경유해 50여시간의 비행 끝에 대회 개막 바로 전날 밤에 스위스 베른에 도착하였고 준비 없이 경기에 임했습니다. 당시 선수 교체도 없어 경기 도중 일부 탈진한 선수 몇 명이 쓰러지기도 하였으며, 결국 헝가리에게 0:9, 튀르키예에게 0 :7이라는 큰 점수 차로 패배, 대회 꼴찌로 세계의 높은 장벽을 실감한 채 귀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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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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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왜 인목대비를 폐출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광해군은 결국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강제로 왕위에서 끌려나왔고 인목대비가 유폐된 경운궁 석어당 앞에 무릎꿇리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킵니다.1608년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마음이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5세 된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넘깁니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이유로 이이첨, 정인홍, 이산해 등의 공격을 받고 몰락합니다.1614년에는 일곱 명의 서자들이 강도가 되어 상인을 약탈하는 칠서의 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이이첨 일파는 사건을 확대시켜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됩이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1617년부터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대두됩니다. 이후 경연과 정청에서 인목대비 폐비론의 가부를 논논하게 됩니다. 이때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비 여론을 주도하였습니다.칠서의 변과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북인은 인목왕후의 폐비를 주장했고,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폐위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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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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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복자를 왜 거꾸로 쓰는걸 좋아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뒤집혀 걸린 복을 중국어로 ‘다오푸(倒福)’라고 합니다. 뒤집힌다는 다오(倒)는 도착을 의미하는 다오(到)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다오푸(倒福)’는 ‘다오푸(到福)’가 됩니다. 복이란 글자가 뒤집혀야 복이 나에게 실제로 도착한다는 현실적 의미로 바뀐다네요.따라서 말 그대로 복자를 거꾸로 놓으면 ‘복이 도달한다’는 의미와 상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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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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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지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날짜가 일정하지 않아 로마 교회에서 1월 6일 '신현절’, 또는 3월 21일(춘분), 12월 25일(동지) 가운데 하루를 택해 성탄절로 지켰다고 하네요. 로마 교황 리베리어스가 354년에 1월6일을 신현절 혹은 세례절로, 12월25일을 성탄절이라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379년 동방 교회에서 12월 25일 성탄절로 여기면서 굳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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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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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령숙수는 관직으로 따지면 어느정도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령숙수(待令熟手)는 조선시대 궁중의 남자 조리사립니다. 대령(待令)이란 왕명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숙수(熟手)는 요리사를 일컫습니다.이들은 궁중음식을 맡은 이조(吏曹) 사옹원(司饔院)에 속해 있었으며 총책임자는 정3품 당하관 제거였고, 그 밑에 요리를 맡는 재부, 선부, 조부, 임부, 팽부 들로 종6품에서 종9품까지의 품계를 지닌 조리 기술자로 중인계급이었습니다.정3품이면, 당시 참의, 목사급입니다. 오늘날은 실장, 시장 수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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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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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산의 위치는 현재 지명으로 어디일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모산은 대조영이 군대를 일으킨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떨어진 곳이라고 했습니다. 구당서엔 “대조영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의 계루부가 있던 땅을 차지하여 동모산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당서엔 “대씨(大氏)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했다”고 쓰여 있습니다.그러면 동모산은 어디인가. 영주는 랴오닝성 차오양(遼寧省 朝陽)인데, 동모산은 그곳에서 1,000km 정도 동쪽에 위치해 있다고 했습니다. 당나라 역사서들이 거리를 실측하지 않고 어림잡아 설명했기 때문에 동모산의 위치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여러 주장이 있지만 최근에는 동모산은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 돈화시에 소재한 성산자산성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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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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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결초보은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결초보은(結草報恩)"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작은 은혜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갚아야 함을 강조하며,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결초결초의 유래는 중국 춘추시대의 이야기에서 나왔습니다. 위주라는 진나라의 대신이 병을 앓았고, 유언으로는 젊은 후처를 본인의 사망 후 개가시키도록 아들 위과에게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후처를 순장하라는 다른 유언을 남겼습니다. 위과는 아버지의 상반된 유언 중 어느 것을 따를지 고민했지만, 결국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했을 때의 유언을 따라 후처를 개가시켰습니다.나중에 위과는 전장에서 용맹한 적장 두회와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전투는 위과에게 불리했지만, 두회가 타던 말이 갑자기 넘어져 위과는 두회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풀들이 매듭지어져 있었습니다.그날 밤, 위과는 꿈에서 후처의 아버지가 나타나서 그가 풀을 엮어 두회를 잡게 도와준 것이 후처를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킨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작은 은혜라도 잊지 않고 반드시 갚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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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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