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녹수는 신분이 노비였는데 어떻게 궁으로 들어갔고 후궁까지 갈 수 있었나요?
장녹수는 본래 연산군의 종형인 제안대군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연산군이 미인집결령을 내려 조선 팔도에서 미인, 재능 있는 여인들을 선발했는데, 장녹수도 기생 , 기예를 가진 여성으로 궁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노비 출신이지만 기예와 외모가 뛰어난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 법적으로 후궁은 양인 대상이나 실제로는 왕의 총애를 받아 승은을 받으면 후궁이 가능하였습니다. 장녹수는 입궁 직후 승은을 받아 종 4품 숙원, 그리고 1년만에 종3품 숙용으로 승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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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베델이 조선을 도와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베델은 영국인으로 원래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일본에서 들어온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 통신원입니다. 그런데, 러일전쟁 중에 일본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강한 분노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영국인으로 당시 영일 동맹으로 일본을 적대적으로 보기 어려웠지만 조선인들의 고통과 일본의 침략적 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해야 한다는 인식, 정의감을 갖게되면서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여 보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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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형식에서 쿼티라고 있던데 긔게 뭔가요??
쿼티((QWERTY)는 영문 키보드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자판입니다. 이는 Q, W, E, R, T, Y가 맨 위쪽에 왼쪽부터 배치되어 있어 붙인 키보드 명칭입니다. 천지인은 10개 버튼으로 한글을 조합하여 입력하며, 퀴티는 26영문 키를 기준으로 한글 자모를 배치해 입력 속도가 빠릅니다. 그런데, 쓰기 편함은 평소 쓰기 편한 키보드를 선택하는 것을 추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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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궁술 이외에 근접 전투용 병장기도?
이성계는 왜구와 황산 전투에서 적장을 활로 맞혀 죽게할 정도로 신기급 명사수라고 뛰어나다고는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함흥, 영흥 지역에서 말타기, 창술, 검술 등을 수련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원나라 장수 다섯명과 일기토를 벌여 며칠 안되어 죽였다는 것은 <고려사>의 공식 기록에는 없는 후대 전설에 가까운 묘사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비록 궁술 이외에 근접전 무술인 검, 창, 기마술 등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지만 북방에서 성장하면서 충분히 정상급 수준이었을 것으로 충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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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개인 무력은 어느 정도?
이순신 장군은 무과 시험 28명 선발 가운데 12위에 합격하였습니다. 당시 무과 합격자 대부분은 5급 이상의 무예 실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12등은 그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여진 토벌 과정에서 10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1000명의 여진 기병에 맞서 승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직접 전투에서 나설 정도로 무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임진왜란 중에서는 주로 전술을 지휘하여 그의 무력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개인적으로 무력이 출중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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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적장자 승계가 지켜진 정통성이 완벽한 왕은 단종밖에 없었나요?
조선시대 적장자가 국왕으로 즉위한 경우는 단종 이외에도 모두 7명입니다. 적장자는 정실 왕비의 아들 가운데 맏아들을 말합니다. 정실 소생의 맏아들로는 문종(세종의 맏아들), 단종(문종의 맏아들), 연산군(성종의 맏아들), 인종(중종의 맏아들), 현종(효종의 맏아들), 숙종(현종의 맏아들), 순종(고종의 맏아들)입니다. 하지만 적장자 승계가 연속적으로 이어진 경우는 비록은 세종은 셋째 아들에 해당하지만 세종의 적장자 문종, 그리고 단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유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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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토지제도 개편을 할 때 최초 국민투표를 시행했다던데 어떤 식으로 한 것인가요?
세종대왕은 1430년 전세를 거두는 방법인 공법 '전분6등과 연분9등'을 도입하면서 전국 각지의 17만명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공법을 도입하는데, 찬성과 반대를 묻는 설문 조사 형식입니다. 즉 직접 찾아가서 말로 찬성과 반대를 묻고, 그 결과를 통계로 분석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형식입니다. 설문은 5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결과를 확인하고도 다수결로 밀어붙이지 않고 반대 이유를 분석하여 공법을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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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아들들을 보면 XX대군, XX군 이렇게 나눠져있던데 어떤 경우 대군이고 어떤 경우에 군인가요?
조선시대 왕자의 호칭은 정실 왕비의 아들일 경우는 대군, 후궁의 아들인 경우는 군을 붙입니다. 예를 들어 선조의 유일한 적장자인 인목대비의 아들은 영창대군, 그리고 임해군, 광해군, 순화군 등은 모두 후궁의 아들입니다.그리고 대군의 품계는 무품이며, 군은 정1품에서 종 2품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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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전술이 혁명적으로 발달하던 시기가 언제인가요?
전쟁에서 전술이 혁명적으로 발달한 시기는 우선 15~16세기 기병 중심에서 총병과 포병의 조합이 전술에 활용되면서 부터입니다. 그리고 18세기 총검이 보병에 활용되고, 19세기 대규모 징집병의 등장으로 참호전, 화력 집중이 새로운 전술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20세기 들어서 전차, 항공기, 전자전 등 첨단 무기의 등장은 더욱 전술의 힘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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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권에서 총이 개발했을때도 창병이 중요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초기 병사들의 화기인 총은 화승총, 머스킷으로 재장전 속도가 매우 느렸습니다. 전장에서 총이 중심이 되더라도 창병은 기동 병력 차단하는 장벽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총만으로 근접전에서 효과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총병과 창병이 섞여 밀집 진형을 유지한 것입니다. 창은 만들기 쉽고 숙련도가 낮아 경제적으로 운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창병이 사라진 것은 18세기 총검이 보편화되면서 부터입니다. 즉 총검이 등장하면서 창병의 역할에 총병에 흡수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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