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부처님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만든 목판본이라는데,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은 비결이 뭔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팔만 대장경이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고 있는 것은 우선 방부 처리 덕분입니다. 제작에 앞서 나무를 2~3년간 바닷물에 담가 두어 진액을 삐고 부패 성분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경판 크기로 자른뒤 소금물에 삶아 나무의 수분 흡수 성질을 조절하고, 소금기가 목재 표면에 발려 갈라짐, 비틀어짐을 줄였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약 1년간 천천히 건조하여 결함을 최소화하였습니다.두번째로는 보관 공간입니다. 대장경판은 현재 해안시 장경판전에 보관하고 있는데, 짛여적으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열린 지형에 세워져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건물을 비스듬히 스치며 환기가 잘 됩니다. 그리고 창호도 공기가 골고루 잘 돌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닥을 깊이 파고 숯, 찰흙, 모래와 소금, 횟가루를 층층히 다져 넣어 장마철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가뭄에는 수분을 내 보내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으며, 경판도 세로로 겹쳐 세워 공기 통로를 확보하여 습도와 부패를 방지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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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때 남송은 왜 몽골을 도왔나요?
남송이 몽골과 연합해 금나를 공격한 이유는 금나라와의 오랜 적대 관계 때문입니다. 1125년 북송과 금은 맹약을 맺고 요나라를 멸망시켰지만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였습니다. 이후 강남으로 천도하고 남송을 건국하여 금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남송은 회수 이북 영토를 상실하고 금에 신하의 예를 취하며 막대한 세공을 바치는 강화조약(1142년)을 체결했지만, 화북 회복과 복수는 남송의 지속적인 목표였습니다.13세기 몽골이 성장해 금을 압박하자 금은 남송에 평화를 제안했으나 오히려 금의 멸망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몽골과 우호 관계를 맺어 전쟁 준비 시간을 벌고자 했습니다. 결국 남송은 몽골과 연합해 금의 최후 거점을 공격했고,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금 멸망 이후 곧바로 몽골은 남송을 침공하여 44년간 전쟁 끝에 1279년 멸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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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는 천민이었지만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귀족, 양반으로 바뀐 경우도 있나요?
우선적으로 고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신분의 변화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삼국시대는 신분제 사회가 확고해 신분 이동이 제한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의 골품제는 혈통 중심의 신분제로 신분 상승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 혼란으로 신분 질서가 약화되어 지방에는 호족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삼국 시대처럼 경직되지는 않지만 신분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중간계층인 향리도 과거를 통해 귀족으로 상승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법제상 양천제를 계승했지만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반상제가 굳어졌고, 과거 급제, 군공 등으로 신분 상승 통로가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가 붕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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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신문들이 석간에서 조간으로 바뀐 이유는 뭐에요?
석간 신문 체제에서 조간으로 바뀐 것은 정치적 이유보다는 1990년대 이후 시장, 수요 배달 구조의 변화입니다. 1980~1990년대 TV뉴스가 발달하면서 신문의 석간의 속보 장점이 약화되었고, 출근길, 아침 시간대에 뉴스를 찾는 직장인과 학생 수요가 늘었습니다. 게다가 광고주가 조간 광고를 선호하면서 석간의 경쟁력이 밀린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통난과 배달 난이 심화되면서 조간 중심의 유통 체계에서 석간이 경쟁력에서 밀리자 1991년 경향신문이 조간으로 전환한 것을 시작으로 1993년 동아일보, 매일경제, 1995년 중앙일보 등 주요 일간지가 차례로 조간으로 바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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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가요 황조가에 담긴 유리왕의 슬픈 사랑이야기의 가치가 궁금합니다.
<황조가>는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4언 4구 한역가입니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 사후 골천인 화희와 한인 치희를 계실로 얻었는데 사냥 간 사이 두 계비가 다투자 치희가 떠나 쫒아갔으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홀로 돌아오던 왕이 나무 아래서 꾀꼬리가 짝지어 노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외로움을 노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조가는 우리나라 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개인적 서정시입니다. 또한 선경후정과 대조법을 통해 꾀꼬리의 다정한 모습과 임을 잃은 화자의 고독을 대비시켜 이별의 아픔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꾀꼬리를 빌어 감정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객관적 상관물 기법의 초기 사례로 후대 시가의 정서 표현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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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시대 경제적 수탈과 농민들의 삶의 변화에 대해 알려주세요.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과 무신에 대한 차별로 1170년 무신정변이 촉발되었습니다. 집권 무신들과 권세가는 공음전시과 등 제도를 악용하거나 강제로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늘렸으며, 이로 인해 농민은 몰락하였습니다. 게다가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수취체제가 악화되고, 지방관과 향리의 수탈이 일상화되어 농촌 사회가 붕괴되었습니다.이에 농민과 천민은 대규모 봉기로 나섰습니다. 대표적 사례로 1176년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는 공주를 봉기하여 공주를 함락하며 1년 반동안 충청도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그 외에도 운문, 초전의 김사미, 효심의 봉기 등 각지에서 봉기가 잇다랐습니다.즉, 무신정권기 토지겸병·수탈 심화로 농민·천민이 몰락하자 망이·망소이의 난을 비롯한 전국적 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진압되었으나 신분제 동요와 수취 체제 개편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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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이 불교계와 손을 잡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고려 무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무신정변 이전 불교는 개경 중심의 교종이 문벌 귀족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무신 정변으로 교종 세력도 타격을 입었습니다. 반면 지방에서 결사 중심으로 선종 불교가 대중을 지지를 받으며 유행하고 있었으며, 무신들은 교종보다는 선종 불교를 후원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또한 몽골 침입 등 국난기에 팔만대장경 조성 등 대규모 불사를 지원해 백성의 사기를 북돋우고 정권 유지의 구심점으로 활용했습니다. 즉, 무신정권은 문벌귀족과 결탁한 기존 교종을 견제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지방의 결사불교·선종을 후원함으로써 정권의 정당성과 사회적 결속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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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된 민주주의가 시민들이 직접 투표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는데, 오늘날 우리가 행사하는 대의 민주주의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는 시민이 직접 민회에 참여해 법안, 정책, 전쟁, 재판 등을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였습니다. 공직 선거도 추첨을 통해 선임되었습니다. 하지만 추첨, 담임제로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도편 추방제 등의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다만 성인 남성만 참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과 외국인, 노예는 배제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의제 정치를 시행합니다. 즉 대표를 선출하여 주요 사항을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성별, 나이, 신분의 제한이 없는 보통 선거를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접 민주 정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국민투표, 국민 발안, 국민 소환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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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는 왜 실측 없이도 그렇게 정확한 지도로 평가받나요?
현대적 의미의 실측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기리고차, 간승같은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를 사용하여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기존에 쌓인 도리 기록을 체계화하고 현장 조사를 보정하였습니다. 각 군현의 문헌 기반 도리를 수집하고, 비교 정리하여 도로망과 거리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여기에 김정호는 도로, 역참, 나루, 고개 등을 현지에서 확인하는 현장 검증을 병행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김정호는 100리를 1척으로 하는 백리척을 활용하여 도상 거리와 실제 거리를 연결하고, 지도 첫장에 방격표로 축척을 명시했습니다. 또한 도로는 10리마다 방점을 찍어 이용자가 점 개수를 세어 거리를 바로 읽게 했습니다. 즉, 현대의 정밀한 측량 장비는 없었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전통적인 방안법과 축척, 그리고 문헌 기반의 자료를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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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어와 힌디어 중에 전망이뭐가 더 나을까요
장기적으로 본다면 인도어가 전망이 낫다고 봅니다. 인도는 세계 5위의 경제 규모로 연평균 6% 중반 성장 지소가고 있습니다. 인구도 세계 최대로 14억이며, 이 가운데 중산층은 1억명 이상으로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는 내수, 인프라 구축, 디지털, 스타트업 등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어 미래 전망이 큽니다. 그리고 인도어를 습득하면 우르드어 등의 이해가 용이하고, 영어 병용 환경에서 비즈니스 연계가 유리합니다. 태국어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태국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과 함께 공급망과 제조업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관광과 서비스, 문화 콘텐츠에도 유리합니다. 하지만 거시 경제 모덴텀은 인도보다 약합니다. 거시 경제·시장 규모·장기 성장만 보면 힌디어가 더 유망하고, 태국어는 태국 중심의 특정 산업·현지 밀착형 진로에 강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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