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를 뜻하는 '싸울아비'라는 말은 언제 처음 쓰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싸울아비는 '무사(武士)', '싸우는 사람'을 뜻하는 한국어의 고어·순우리말이라 합니다. 그런데, 언제 싸울아비의 어휘의 내력과 연원에 대해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문헌이나 전승 등에 발견된 단어가 아니라 조합된 어휘로 추정됩니다.다만 2002년 개봉한 한일 합작 영화 '싸울아비'에서 등장합니다. 영화는 백제 멸망 400년 후 일본에 이주한 백제 중흥을 위해 꿈꾸는 백제 유민을 이야기 영화에서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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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육조거리에 남아 있는 문화 유적에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육조거리는 경복궁 광화문 앞거리로 조선시대 6조 관청이 소재하고 있었습니다. 육조 이외에도 의정부, 삼군부, 중추부, 한성부, 사헌부가 있었습니다. 발굴을 통해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지만 삼군부 외행랑 기초, 사헌부의 유구로 추정되는 행랑과 담장, 우물, 배수로, 민가 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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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릴 열도는 왜 러시아와 일본의 분쟁 지역이 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쿠릴 열도 분쟁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쿠릴 열도 남부의 북방 영토 4개섬(이투루프섬, 쿠나시르섬, 시코탄섬, 하보마이 군도) 분쟁입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북위 50도를 기준으로 남사할린이 일본에 편입되면서 쿠릴 열도도 일본 영토가 됩니다. 그러나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남쿠릴 열도는 소련 영토로 다시 귀속됩니다.샌프란시코 강화조약으로 러시아는 쿠릴열도 전체의 권리를 포기했다고 주장하나 일본은 시코탄섬과 하보마이 군도는 쿠릴열도에 포함되지 않으며, 훗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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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시대의 소도는 삼한에서 한곳뿐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도는 삼한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특수 행정 구역입니다. 제단을 만들고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천군이 산천에 제사를 올렸습니다. 소도는 <삼국지> 30권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삼한에서는 귀신을 믿는다. 국읍에 각기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한 국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이를 '소도'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소도와 천군은 삼한의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이주민 세력이 토착 세력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특수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삼한 소국의 형성 과정에서 이주세력과 토착 세력의 충돌을 완화하고, 제정이 분리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따라서 삼한 곳곳에서 소도라는 특수 행정 구역이 존재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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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 축구의 역사적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AFC 아시안컵은 아시아 지역의 국제 축구대회로 1956년부터 홍콩 대회서 부터 시작하였습니다. UEFA 유로가 1960년이니 아시안컵이 먼저 개최되었습니다. 첫 경기는 4개국만 리그전으로 순위를 결정하였으며, 1위 한국, 2위 이스라엘, 3위 홍콩, 4위 남베트남이었습니다. 한국은 1, 2회만 우승하고 이후 한번도 우승하지 못해 AFC 아시안컵과는 유독 인연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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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있는 발해 시절 유물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통치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발해 영토가 현재 북한, 중국, 러시아 지역이기 때문에 남한 내에서 발해 유물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된 발해실,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하는 300여점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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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 역사 중 우리나라 우승은 언제 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AFC 아시안컵에 1968년, 1976년, 1992년을 제외한 나머지 14번에 걸쳐 본선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1956년과 1960년에는 우승을 차지했습니다.아시안컵 우승 횟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일본으로 4회, 이란과 사우디아리비아 3회, 한국 2회, 쿠웨이트, 이라크, 호주, 카타르, 이스라엘이 1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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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장군 소손녕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손녕은 요나라 장수로 3차 침입시 거란의 10만 대군을 이끈 소배압의 동생입니다. 소손녕 993년 고려에 대한 1차 침입시 80만 대군 지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희와 협상에 넘어가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을 인정하였죠.그는 요나라 경종의 막내 딸 월국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송나라 조빈의 거란 공격에 대항한 공로로 동경유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995년 발해의 유민이 세운 올야를 공격하다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996년 여진의 포로모타부를 공격하고 귀환합니다. 월국공주가 병든 틈타 궁녀와 부적절한 관계하고, 결국 공주가 죽자 황후에게 사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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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은 왜 이리 잔혹하게 처벌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홍경래의 난(1811)에 세도 정치와 평안도에대한 지역 차별에 불만으로 일어나 농민 반란입니다. 몰락 양반 홍경래는 우군칙, 김창시 등과 함께 이 지역의 농민, 상인, 광산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봉기하였습니다. 결국 관군에 의해 진압되어 2983명이 체포되고,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 1917명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이렇게 가혹하게 처형한 이유는 조선시대 가장 중범죄로 강상죄와 함께 반역죄는 엄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즉 홍경래의 난에 가담자들은 모두 반역자로 엄하게 처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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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포가 이방원에게 등을 돌린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398년 1차 왕자의 난 당시 박포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을 동정을 정탐하고, 이방원의 명령으로 민무질과 조준을 부르려고 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죽성공에 봉해지고 지중추부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등 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것을 불평하여 1400년 이방간을 도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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