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때는 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영향력이 그렇게 컸나요?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는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1545년 인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이복 동생인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당시 관례에 따라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렴청정을 하면서 문정왕후는 관료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고 중요한 정치적 현안을 본인이 결정하였습니다. 게다가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을 핵심으로 삼아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특히 을사사화를 배후 조정하여 많은 사림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에도 심취하여 승과를 부활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했습니다.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 장악을 한 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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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씨와 성주이씨의 차이가 있는지
성산이씨와 성주이씨는 다로 뿌리가 다른 성씨입니다. 성산이씨는 신라 말 호족인 이능일을 시조로 성주군을 본관으로 하였는데, 1914년 본관을 성산으로 확정했습니다. 성주 이씨는 고려초 이순유를 시조로 하여 성주를 관향으로 삼은 가문입니다.즉, 성산이씨와 성주이씨는 같은 성씨가 아니라 뿌리가 다른 성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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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짧았던 전쟁도 있을것 같은데 어떤 전쟁인가요?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은 1896년 8월 27일 영국과 잔지바르 술탄국 사이에 벌어진 영국-잔지바르 전쟁으로 38분만에 끝난 전쟁입니다. 전쟁의 요인은 잔지바르의 친 독일적인 새 술탄을 영국이 승인하지 않고 군대 해산과 퇴위를 요구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함포가 잔지바르 궁전을 포격하자 곧바로 항복했는데, 잔지바르군 수백명이 전사했지만 영국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새 술탄도 독일 영사관으로 도주하였으며, 친영적인 술탄이 옹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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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내용 중 실제 역사인 내용이 있나요?
성경에서 언급된 이스라엘은 실재 역사에서도 존재하는 왕국입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시대이 이스라엘 왕국은 고대 기록과 고고학에서 일부 증거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앗수르, 바빌론, 이집트 같은 나라도 성경에 나오는 데, 다른 고대 기록에도 존재한느 역사입니다. 또한 예수와 사도들이 활동한 로마시대, 유대 총독들도 역사 기록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십자군 전쟁은 1095년 우르반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주창하여 일어난 성지 회복 전쟁으로 성경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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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내용 중 역사인 내용,부탁드립니다
구약성서에는 여러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합니다. 우선 이스라엘 왕국은 고대 실제로 존재했던 왕국입니다. 고고학적 증거외에도 고대 기록에도 존재하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며, 모세와 이집트 탈출, 다윗왕, 솔로몬왕, 바벨론 포로 등 사건들은 고대 근동 역사 기록과도 일부 겹칩니다. 성경의 기술과 역사적 사실이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역사학자들마다 논의가 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존재하는 점은 사실입니다.그리고 십자군 전쟁은 성경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주창하여 200년간 있었던 성지회복 운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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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문관과 무관중 어느쪽의 힘이 강했나요?
조선시대 평시에는 문관이 훨씬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성계가 무관출신이지만 새나라를 세우면서 문치 국가의 체제를 확립했으며 그 결과 문신 관료 체제가 주류를 이룬 것입니다.최고위 관직인 정1품은 문관이 오를 수 있었지만 무관은 정3품 수준의 절충장군까지 승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즉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를 지향했기에 무는 천시되는 분위기가 일반적입니다. 물론 전쟁 시기에는 이순신같은 무관의 활약으로 무관이 부각될 수 있었지만 일시적인 위상에 해당됩니다.즉,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이기에 무보다는 문을 숭상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문관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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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볼모로 왕자가 아닌 15촌 조카를 보내서 걸린 사건은 어떻게 해결되었나요?
이 사건은 1241년 제 3차 여몽전쟁 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할 때 일어났습니다. 몽골은 태자의 입조를 요구했는데, 고려는 평범한 왕족인 영녕공 왕준을 왕자라고 속이고 보낸 것입니다. 10년뒤 몽골이 이를 알았으나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간 사건입니다. 그 이유는 고려가 왕준에 대해 '친아들'이라고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몽골측 반응도 왕준이 원만한 성격과 몽골 황제의 신임 덕분에 넘어갔습니다. 왕준은 이후 몽골에서 몽골 황녀와 혼인하고, 안무고려군민총관 같은 직책을 맡아 몽골과 고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귀족화 경향이 강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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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은 일제의 국권 피탈이라 봅니다. 일제 강점기는 근대화로 가는 큰 변혁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식민 통치로 민족 문화는 물론이고 민족 정신에 큰 상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친일 잔재는 현재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과제입니다. 또한 일제 강점기는 분단을 씨앗이 되었습니다. 만약 국권 피탈이 되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분단도 없었을 것입니다. 분단은 한국 전쟁의 배경이 되었으며, 현재도 그 고통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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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사고는 어디어디 있나요??
본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는 전국 5곳인 춘추관, 강화, 전주, 성주, 충주사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을 제외하고 소실되었습니다. 임란 후 전주 사고본을 필사하여 춘추관, 정족산, 적상산, 태박산,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하였습니다. 그리고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춘추관 사고는 불타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족산사고는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광복 이후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었고, 현재는 일부가 국가기록원 등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태백산 사고는 1985년 국가기록원에 보관하고 있으며, 오대산 사고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 유출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상당수 소실되고 일부 환수되어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상산 사고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으로 이동하여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보관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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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은 왜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 100년 가까이 걸렸나요?
조선시대 조세제도는 전세, 공납, 역으로 구분하여 시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지나면서 모순과 해이해졌습니다. 특히 공납은 상인과 아전들의 농간이 많아 방납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습니다.따라서 광해군은 가호 단위를 걷던 토산품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 옷감, 동전 등으로 내는 제도로 개선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비록 경기도에서만 시행되었지만 토지 단위로 하면서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들었으나 지주들의 반발이 커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지주들의 반발로 숙종 때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는데 무려 100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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