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왜 상업도시들이 발달할 수 있었나요?
전국시대에는 혼란 속에서도 상업 도시가 발달했습니다. 전쟁중 다이묘들은 무기, 식량 등 물자 공급이 필요했는데, 상인들이 이를 공급하면서 이익을 얻었습니다. 또한 일본 오사카부 남부에 있는 사키이처럼 바다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도시는 조총과 같은 새로운 물품과 기술이 들어오는 창구였으며, 중국, 조선, 동남아시아, 유럽 무역을 하며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또한 다이묘들은 영주의 성주변에 조카마치를 만들어 상업 발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카마치에는 사무라이들이 거주하면서 다이묘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시장과 행정의 중심지로서 조닌 계급의 성장을 자극했습니다. 조닌은 생활 필수품을 판매하기도 했지만 칼, 도자기 등을 생산하고 유통과 운송, 금융에 종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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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어떻게 다양한 질병에대한 정보를 안수있을까요?
옛날 사람들도 병과 약초에 대한 지식을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관리했습니다. 어떤 병에 어떤 약초가 효과가 있는지, 그리고 통증을 줄이거나 낫는지 정리하여 전한 것입니다. 이왁 관련된 지식은 가족과 마을, 무당과 의원을 통해 말로 전하다가 의학이 발달하면서 책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본초학과 의학 지식이 수용되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우리나라에 실정에 맞는 약초로 처방하는 수준까지 발전하였는데, 이를 <향약구급방>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에는 <향약집성방>, <의방유취>로 정리하였으며, 조선후기 <동의보감>의로 집대성하였습니다. 다만 당시의 모든 치료법이 오늘날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경험에 근거한 유용한 치료도 있었지만 질병을 귀신에 있다고 보고 무당의 주술 등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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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 민속 놀이에는 어떤 놀이 들이 있는지 알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전통 놀이는 계절과 명절, 연령마다 매우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날에는 윷놀이가 있는데, 윳놀이는 어른에서 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이 즐기는 놀이입니다. 그리고 연날리기, 팽이치기는 어린이들이 주로 즐겼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널뛰기도 즐겼습니다.그리고 정월대보름은 쥐불놀이, 줄다리기, 달집태우기, 다리밟기, 고싸움 놀이를 즐겼는데, 주로 어른과 마을 공동체로 즐겼습니다. 단오에는 씨름, 그네뛰기가 있으며, 추석에는 강강술래, 소싸움, 거북놀이와 길쌈놀이가 있습니다.그리고 계절과 명절과 관계 없는 놀이로는 제기차기, 공기놀이, 비석치기, 자치기, 사방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등은 어린이들이 좋아한 놀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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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생일을 지금처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요?
과거 사람들도 생일을 맞이하여 기념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모든 사람이 매년 자신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왕이나 귀족 등 일부 특권층만이 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이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수월치 않았을 것입니다.오늘날의 생일은 개인에게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가족 중심 생활과 케이크 등 파티, 그리고 간단한 선물을 주는 문화는 일상화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가족, 가문, 공동체가 개인보다 중요했지만 오늘날의 생일은 자신이 태어나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있는 날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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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넘어 뭘 하며 살지, 사회가 답을 줘야 할까요?
70세 이후 삶에 대해 사회가 답을 줄 필요는 없지만 기회와 환경은 마련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퇴 이후 30년은 수입 없이 버텨야 하는 시간입니다. 정부 및 사회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이에 맞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초고령화 사회에서 경제 활동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어 극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점차 줄 것입니다. 따라서 노인들도 자신의 근로 능력에 맞는 일자리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사회는 노인 맞춤형 일자리 및 사회 공헌을 위한 기회, 정보 제공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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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의 원인은 어떻게 분석하나요?
역사학에서는 사건의 원인을 하나로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여러 요인이 서로 어떻게 작용했는지 분석합니다. 먼저 정치, 경제, 사회, 사상, 국제 관계 등으로 나누고 장기적인 구조적 원인과 사건 직전의 직접적 계기를 구분합니다.예를 들어 혁명이 일어나면 경제가 어려워져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정치 지도자가 갈등하였으며, 전쟁이나 국제 정세가 위기를 키웠을 수 있습니다. 즉,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합니다.따라서 역사학에서 원인 분석이란 '어떤 하나로 인해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 가운데 어떤 요인이 더 중요했는지 요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찾아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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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할복 문화는 전국시대에 왜 발달했나요?
전국시대 할복이 발달한 것은 단순히 명예를 중시한 것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전쟁 속에서 패배, 포로, 배신의 수치와 가족의 처벌 문제를 처리하는 사회적 장치로 가능하엿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에는 다이묘들이 서로 편을 나누어 전쟁을 벌였는데, 성이 함락되거나 지휘관이 포위되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무라이가 적에게 붙잡잏면 심문, 처형되거나 가문 전첵 몰락합니다. 이 상황에서 사무라이는 적에게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죽음으로서 부하와 가족이 목숨을 보장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승자가 패배자를 처벌하면서도 '명예로운 죽음'을 허용하는 정치적 관행이기도 했습니다. 즉, 할복은 명예를 위해 죽는 낭만적인 사무라이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전쟁과 질서 속에서 패배, 책임, 충성과 처벌을 동시에 처리한 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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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신약 거부에 대해 궁금해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가 자신들이 기대한 메시아상과 맞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또한 예수의 죽음과 그 이후 기독교의 확장을 계기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점점 분리되었습니다. 특히 유대교가 출애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약의 예언을 완성한 메시아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은 유대교의 성경이 아니라 기독교의 성경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유대인의 흩어짐은 출애굽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바빌론 유수,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 같은 역사적 사건이 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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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온달은 정말실존한인물인가요?
맞습니다. 온달은 <삼국사기>에 온달전에 실려 있을 정도로 고구려 평원왕, 영양왕 때 활약한 장군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보 온달 이야기 전체가 그대로 실화라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신분을 뛰어넘는 결합인데, 이를 통해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신분질서를 흔드는 매우 파격적인 혼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온달은 하층 귀족 출신이나 능력이 있던 장수였고, 왕실과 평강공주는 그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평강 공주는 그를 도와 성장을 돕는 능동적인 인물로 짐작합니다. 온달은 고구려 장군이고, 평강공주와 혼인했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 수복을 위해 출전했다가 전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즉, 두 사람은 실존 인물이 맞지만 이야기 상당부분은 설화나 미화가 섞인 전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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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는 왜 일본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나요?
히데요시 사후 권력 공백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10월 21일 일본 중부의 세키가하라에서 있었던 전투입니다.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려 한 이시다 미쓰나리 중심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맞붙었습니다. 전투에서 서군 내부 결속도 약했는데, 게다가 고바야키와 히테아키가 전투 중에 이야야스 편으로 돌아서고 모리 가문도 적극 싸우지 않아 서군 지휘 체계 붕괴되면서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이에야스 승리 이후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은 영지를 몰수당하거나 축소되고, 자신의 편에 든 다이묘들에게 분배하여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603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거한 뒤 에도 막부를 열어 쇼군이 되어 일본 천하를 지배하였습니다.즉,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군사적 승리로 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새로운 에도 막부 체제를 연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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