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이란 말은 정확히 어떤 뜻이죠?
확증편향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이나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관심을 가지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믿지 않는 경향을 말합니다.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확증편향이 강하면 틀린 판단을 오래 붙잡게 되며, 반대 근거를 봐도 잘 안 바뀝니다. 이와 같은 확증편향은 사람이 원래 가진 믿음을 쉽게 바꾸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생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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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서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시각으로 쓰여진 역사서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 역사서 가운데 가장 객관적으로 서술된 것은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생전 평가와 아니라 사후 편찬이 원칙이지만 당시 일상 기록이 비교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도 함부로 열람하지 못했습니다. 사관은 왕의 언행과 정사를 결에서 기록했고, 그 기록이 사초와 실록 편찬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록 담당자는 비교적 정치 권력으로부터 비교적 분리된 기록 원칙을 지켜려 했습니다. 이와 같은 객관적 기록과 신뢰도를 높이 평가하여 유네스코에서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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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은 영국의 묵인이 있었다던데 정말일까요?
엘바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군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지만 매우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를 섬에 묶어 놓았으며, 사실상 방치하였습니다. 즉 영국은 나폴레옹이 위험하지만 통제 가능한 존재로 보고, 엘바섬에 둔 것이지 탈출을 도와준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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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화에서 사용하는 어미가 급변했을까요?
근대화를 거치면서 말의 예절이 갑자기 바뀌기 보다는 사회 구조, 교육, 문자 생활이 함께 바뀐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선시대에는 '하오체'와 같은 말투는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가 지배했기 때문이나 근대화 이후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 보급과 평등적 소통 관계가 확산되면서 위계적 말투 보다는 누구에게나 사용하는 중간적 수준의 공손한 말투가 일반화 된 것입니다. 또힌 과거에는 말과 문자가 서로 다른 문어체를 사용하여 기록했으나 오늘날은 언문일치가 실현되면서 일상 대화가 기록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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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가장 부패했던 시대는 언제라고 할 수 있나요?
조선시대 가장 부패한 시기는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년간 세도정치 시기입니다. 세도 정치는 어린 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측근인 외척가문이 비변사, 훈련도감 등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매관매직, 인사 비리이 성행했습니다. 특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만연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들의 삶이 파탄에 이르렀습니다.고종 초기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통치제제를 재정비하고, 삼정의 문란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민씨 세력이 득세하면서 또다시 국정이 문란하고, 삼정의 문란이 재발되었습니다. 게다가 외세의 침략이 가중되면서 농민들의 농촌 경제가 파탄되었으며, 농민들이 더욱 궁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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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왜 과거에 깃털펜을 사용햇나여?
서양에서 깃털펜을 사용한 것은 우선 가볍고 다루기 편해서입니다. 그리고 거위나 백조 같은 털은 구하기도 쉬웠습니다. 또한 깃털의 미세한 내부 공간은 잉크를 오랫동안 머금을 수 있었습니다. 끝을 칼로 잘라 펜촉처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어 글씨를 섬세하게 쓸 수 있습니다. 깃털펜은 중세 유럽에서 19세기 금속펜이 나오기 전까지 사용했습니다. 비록 현재는 볼펜, 만년필 등의 필기도구의 발달로 사용하지 않지만 중세 유럽에서 가장 쉽게 구하고, 사용하기 편리하기 때문에 널리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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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물과 유적의 차이가 무엇인지가 궁금합니다.
문화재 가운데 유물은 토기, 도자기, 무기, 장신구 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유적은 집터, 무덤, 성터, 절터 등 자리가 정해진 장소나 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상감청자는 유물이지만 경주 천마총, 황룡사지와 같은 것은 유적이라 합니다. 즉, 유물은 들고 옮길 수 있는 것, 유적은 장소 자체가 남아 잇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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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이 백제로 도림이라는 간첩을 보냈다는데 이로 인해 백제는 어떤 피해가 있었나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에게 도림을 보내 백제의 저항을 약화시켰습니다. 장수왕은 도림을 보내 바둑 실력으로 개로왕이 환심을 사게 한 뒤 개로왕의 자존심을 건드려 궁궐을 축성하게 하여 재정 탕진,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것입니다. 또한 내부 공사와 소모로 허술한 방어로 군사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즉, 장수왕은 첩자 도림을 보내 백제 스스로 힘을 빼게하여 장수왕이 손쉽게 한성을 점령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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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어떻게 고구려 백제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나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 있어 가장 늦은 시기인 6세기에 들어서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처럼 압도적 군사력도, 백제처럼 해상 네트워크도 없었습니다. 신라는 이런 조건 때문에 오히려 정면 충돌을 고집하지 않고 동맹을 통해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 사례가 5세기 고구려 전성기때 나제동맹, 그리고 7세기는 나당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즉 신라는 외교 관계를 통해 어려운 상황을 극ㅂ고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는 내부 결속을 강화했습니다. 신라는 불교, 관등제, 화랑도 등을 활용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여 어려운 정국을 극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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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유럽 왕실에서는 왜 근친혼이 그렇게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그로 인한 유전적 질병은 왜 무시되었나요?
유럽 왕실에서 성행한 근친혼은 권력, 재산, 정통성을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전략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외부 가문과 결혼하면 상속권과 영향력이 다른 가문으로 새로 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왕가의 혈통을 지키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친혼에 따른 유전병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유전병의 피해는 여러 세대를 걸치면서 서서히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신성로마제국의 황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친혼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턱'이라는 유전병이 발현되었습니다. 즉, 아래턱이 과도하게 돌출되어 주걱턱과 얼굴 비대칭입니다. 마지막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 카롤루스 2세는 신체적 생식적 문제로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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