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계림로 보검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인가요?
경주 계림로 보검은 실제 전투용이 아닌 왕, 귀족의 권위를 보여주는 장식용이며, 무덤의 껴묻거리입니다. 또한 금으로 만들어져 부의 수준을 말해줍니다. 보검의 길이는 36cm이지만 호와 장식이 너무 화려합니다. 제작 기법과 문영으로 보아 실크로드를 통해 국제 무역을 통해 동유럽, 서역산 희귀 보석을 사용하여 신라의 국제적 교역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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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는데 궁금한게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은 1978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에는 군사정권 시기로 군사 교육이 고등학교에서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육과정에서도 교련이 있어 군복 비슷한 복장으로 입고 등하교하였습니다. 또한 학교 분위기도 군사문화가 많아 선생님깨 거수 경례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는 말죽거리 잔혹사 처럼 군사 문화에 따라 학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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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칼 무게가 4kg 남짓했다는데 이걸 들고 전장에 나간건가요?
조선시대 칼은 실전용 칼인 환도와 훈련, 의식용 칼인 언월도로 구분합니다. 실전용 칼은 약 1kg으로 허리에 차고 출정하며, 가볍게 휘둘 수 있는 무게입니다. 반면 훈련, 의식용 칼인 언월도는 훈련, 의식에만 사용하며, 4kg에서 48kg(80근)에 정도됩니다. 이 칼은 무거워 실전에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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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전쟁과 평화의 흐름은 왜 계속되는 것일까요?
인로 역사에서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욕망때문이라 봅니다. 인간은 권력과 야욕이 있으며, 지배자들은 이 때문에 전쟁을 촉발합니다. 또한 국제 체제의 모순도 영향을 미칩니다. 한나라가 국방력을 강화하면 상대국은 위협으로 비춰 군비 경쟁을 하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원, 영토, 권력 불균형, 종교적 대립 등이 갈등을 부축입니다. 전쟁을 겪고 나서도 평화가 일시적으로 나타나지만 얼마 후 망각하여 다시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 전쟁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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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사학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요?
민족주의 사학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자주성을 강조하여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즉, 한민족의 추체적 역사상을 수립하고, 일제의 식민사학을 극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대표적 역사학자로는 박은식, 신채호 등이 주도했습니다. 박은식은 민족 정신인 국혼을 강조하였으며,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편찬하여 보급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낭가사상을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으로 강조했으며,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정인보, 안재홍 등은 조선학 운동을 통해 민족 문화 연구를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은 민족사학의 하위 범쥐로 일제 강점기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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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는 왕위찬탈에 대한 야망이 없었나요?
김종서는 왕위 찬탈의 야망은 없었습니다. 김종서는 세종과 문종의 유서를 충실히 따를 의지가 있었던 신하로 왕위 찬탈을 고려할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문종이 병약할 때 좌의정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단종의 고명 대신으로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했던것 뿐입니다. 오히려 수양대군이 자신의 찬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았으나 그는 일관되게 단종에 대한 충절의 신념을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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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는 누가 규격을 정한건가요??
A4 등 용지 규격을 제안한 사람은 1909년 독일의 물리화학학자 프레드릭 오스트발트입니다. 그리고 1922년 독일 공업 규격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1975년 ISO 216으로 전세계 표준 규격이 되었습니다. 프레드릭 오스트발트는 1:√2 비율 이유: 종이를 반으로 잘라도 비율이 동일하게 유지되도록 수학적으로 계산된 최적 비율로 하여 규격을 나누었습다. 이는 종이 낭비를 최소화하고, 계산이 편하고 확대와 축소에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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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여름을 어떻게 났나여? 답글 바랍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오늘날같이 당연히 더위를 식히는 에어컨, 선풍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오늘날 처럼 여름이 덥지는 않았습니다. 여름 일평균 기온이 20~24도, 그리고, 가장 높은 기온도 25~30도 정도였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여름을 나는 방법은 건물 구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넓은 대청마루, 높은 지붕, 황토 바닥과 정자 같은 피서 구조를 갖춰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자연 그늘과 적극적인 냉기를 활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탁족을 하거나 나무 그늘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름에 통풍이 잘 되는 삼베, 모시 옷을 입거나 부채질을 하는 것입니다. 일부 부자는 석빙고 얼음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외에도 더위를 이기기 위해 삼계탕, 보신탕을 먹어 체력을 보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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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며느리인 소헌왕후 집안을 왜 역적으로 만든건가요?
태종이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부친 심온을 역적을 몰아 처형했습니다. 심온은 당시 영의정으로 당대로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과거 자신의 왕비 원경왕후 민씨 친정인 민제 가문이 권력을 쥐고 정치에 개입하여 권력을 남용한 것에 대한 좋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종이 총녕대군을 세자로 착봉한 이후 그의 장인 심온이 세력을 확장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종은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상왕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만약 심온이 영의정으로 권력을 쥐면 안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즉 심온을 사전에 제거하여 세종이 외척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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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누구인가요?
우리나라의 국왕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즉위한 국왕은 신라 32대 효소왕으로 6세에 692년에 즉위했습니다. 만 나이로 보면 5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헌종은 7세로 24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8세로 표기되기도 했지만 학계에서는 7세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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