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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쌀밥을 못먹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광복 직후 분단과 미군정의 실수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했습니다. 또한 6. 25 전쟁으로 경지가 황폐화되어 식량 사정이 원활하지 못하였고,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원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원조로 제공되는 밀가루로 가공한 식품이 쌀을 대신해 분식이 장려되었습니다.또한 당시 쌀의 품종이 현재의 품종과 비교해 수확량에 작고, 병충해에 취약했습니다. 게다가 수로 및 저수지 등 관개시설이 부족하여 농사 조건이 열악했습니다. 1970년대 통일벼라는 신풍종이 개발하고, 간척 및 관개 시설이 개설되기까지 우리나라는 쌀이 흔한 식량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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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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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인도와의 교역중에서 이후 어떻게 중국와 교역을 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도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와 인도를 경유하여 동남아시아에 이르렀습니다. 1511년 포르투갈은 정화의 남해 원정 이후 명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말레이시아 반도의 말라카(혹은 믈라카)를 침공하였습니다. 명은 강력한 화력을 이용하여 말라카를 침공한 포르투갈인들을 ‘불랑기(佛郞機)’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이들의 등장을 경계하였습니다.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에 도착하고, 조르즈 알바르스를 위시한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광둥성(廣東省)의 ‘타망(Tamão)’이라는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후 명과의 교역을 위해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포르투갈인들은 중국 연안에서 밀무역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 앞바다에 있는 쌍서(雙嶼) 항구를 근거로 활동하나 명의 토벌로 다시 잃게 됩니다. 1553년(명나라 가정(嘉靖) 31년), 포르투갈인이 화물이 젖어서 육지에서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지역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마카오 체류를 인정받았고, 4년 뒤부터는 뇌물을 매년 건네면서 본격적으로 마카오에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도 매년 500냥의 지대(地代)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거주권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포르투갈 상선은 인도 고아(Goa)에서 은화, 기름, 포도주를 가져와, 마카오에서 중국의 생사, 비단, 한방약재, 자기, 사탕으로 교환한 후, 일본에 가서 은으로 교환하며 많은 무역을 한동안 주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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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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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켈트) 민족의 역사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겔트족은 갈리아의 라틴어 켈타이/(Celtae)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빨강 또는 금발에 땋은 머리를 하며, 유럽 최초로 바지를 입었다고 합니다.켈트족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 알프스 산맥 주변에서 출현한 인도유럽인들의 일파입니다. 기원전 7세기경까지는 도나우 지방에서 이동해 온 켈트족이 현재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 정착하였습니다. 켈트족은 물론 로마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럽 전역에 분포해 세력을 유지하였습니다. 전성기에는 흔히 켈트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지역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나 동유럽은 물론이요, 바다 건너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하여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를 자주 약탈하였습니다.그러나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군사적 역량이 성공의 핵심이었지만, 그전에 켈트인들은 게르만족에 의해 크게 소모되어 있었고, 카이사르 역시 깊이 골이 패인 여러 켈트 부족 세력들간의 반목을 적절히 이용해가며 갈리아를 평정했습니다.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 문명에 동화되어 역사 속에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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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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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재혼 이혼등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까지 여성의 재혼과 그리고 재혼하여 낳은 자식에 대해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조선을 고려와 다르게 여러가지로 제한하고, 차별하였습니다. 태종 6년(1406년), 대사헌 허응(許應)의 건의에 따라 양반의 정처(正妻)로 세 번 남편에게 시집가면 자녀안에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그에 따라 삼가녀(三嫁女)를 자녀안에 기록함으로써 그 자손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였습니다.성종 8년 (1477년), 성종은 재가(再嫁)한 여성의 자손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성종은 ‘신(信)은 부덕(婦德)이며, 한 번 같이 했으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고, 삼종지의(三從之義)를 강조하였습니다.성종대 완성된 <경국대전>로 반영되었습니다. 실행부녀(失行婦女)와 재가(再嫁)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는 동반직(東班職)과 서반직(西班職)에 모두 서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증손(曾孫)대에 이르면 의정부, 6조, 한성부, 사헌부, 개성부, 승정원, 장예원, 사간원, 경연, 세자시강원, 춘추관, 지제교, 종부시, 관찰사, 도사, 수령직에 제수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재가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는 관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되고, 증손 이후 자손도 대대로 현직(顯職)에는 진출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양반층 여성의 재가는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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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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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이 생긴 배경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서프랑크 지역의 프랑스에서는 전형적인 지방 분권적 봉건 국가의 모습이었습니다. 왕으로 추대된 카페 왕가는 파리와 그 주변에만 미쳤고, 제후의 세력이 강대한 지방 분권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12세기 말 필리프 2세가 제후 세력을 누르고 프랑스 안의 영국령을 대부분 획득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소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황을 굴복시켜 아비뇽에 가두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내 영국령,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지배권, 영국의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백년 전쟁(1337~1453) 과정에서 국왕권이 강화되고, 마침내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승리하여 통일된 영토를 확보하였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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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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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물의 십자가 모양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래 십자가는 이교에서 유래된 우상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이방 종교에서 신앙의 상징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어디에도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긴 기록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예수의 처형 도구 입니다.이런 십자가가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독교 우대 정책으로 교회가 세속화 되고, 부패한 로마 교회가 게르만 등 이교도들을 전도할 명목으로 이교의 상징물을 사용하게 되면서 확산되었습니다. 431년 교회의 내부에 십자가 도입되었고, 이후 568년경 교회 첨탑에 등장하였습니다.이처럼 십자가는 사도 시대의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고 나중에 교회가 세속화되고, 이교도에 전파되면서 도입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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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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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는 어떻게 신권이 왕권보다 강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4세기 이후 이동한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오랫동안 번영한 나라는 프랑크 왕국입니다. 5세기 말 프랑크족의 메로베우스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가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이후 로마 교회는 동로마 황제의 간섭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에 적극적이었습니다.(800년 카룰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 대관 수여) 프랑크가 분열된 이후 926년 동프랑크의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을 수여합니다. 이후 1054년 동서교회의 분열이 이후 서유럽의 종교적 지배자 로마가톨릭의 교황권과 정치적 지배자 신성 로마 황제와의 세력 대결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그레고리 7세가 교황이 되고서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서임권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항하면서 카노사의 굴욕사건(1077)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1122년 브롬스 협약에 의해 교황의 서임권이 보장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이후 십자군 전쟁 동안 교권은 절정에 이릅니다.중세 유럽인은 교회를 떠나 태어날 수도,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중세인의 정신적 지배자로서 군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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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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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는 근세에 자국의 국가가 사라진경험이 있는데 왜 그러한 일이 발생한걸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영토는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세 주변국에 의해 3차례 분할되어 최종적으로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멸망하였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이후 빈 회의에서 네 번째 분할도 이루어져 유럽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1차 (1772년 8월 5일)는 러시아(에카테레나 여제),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요제프2세)가 폴란드 분할시키고, 2차(1793년 1월 23일), 3차(1795년 10월 24일)로 3국에 분할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폴란드 왕국 지역을 바르샤바 공국으로 부활시켜 나폴레옹의 위성국으로 만듭니다. 그러나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났고 빈 회의의가 열러 복고주의에 입각하여 폴란드는 포즈난 대공국(프로이센 왕국령), 크라쿠프 자유시(오스티리아 제국령), 폴란드 입헌 왕국(러시아 제국령)를 만들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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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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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라는 국가는 입헌군주제인데 이제도가 무엇민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모나코는 모나코 공(公, Prince)이 다스리는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의회제) 국가입니다. 국민의회(Conseil National)는 총 24명의 의원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원내각제 국가와 달리 모나코의 총리는 다수당의 당수가 아닌 프랑스 정부가 추천한 인사 중에서 모나코 공이 임명할 정도로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보호령 아래 있습니다.우람한슴새님이 질문한 입헌군주제라는 것은 국왕이 통치권을 갖고 있으나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법을 통해 국왕권을 제한하고, 헌법에 의해 총리(수상) 등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정치 시스템입니다. 현재 영국, 일본, 태국 등의 국가의 정치제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총리는 다수당의 대표가 되지만 모나코는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기에 프랑스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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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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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중국의 춘추백가 시대에 사상들이 그토록 발달한 배경이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의 춘추전국시대는 제후국 사이의 경쟁이 심화된 시대였습니다. 즉, 먹지 않으면 먹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각 제후국들은 스스로 부국 강병을 위해 국적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 관료로 임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 계층은 지식과 학문을 갖추고 관료로 많이 되면서 크게 성장하였는데, 이에 다양한 사상가와 학파(제자백가)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제각기 현실적인 정치 사상을 제시하며, 국가의 부국 강병에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어필하였습니다. 이들 중 유가, 법가, 도가, 묵가 등이 두드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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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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