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요동 정벌을 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천한 출신으로 명을 건국하고 황제가 된 홍무제는 왕권과 신변의 안전에 불안해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합니다. 게다가 북원이 호시탐탐 명을 겨누기 있기 때문에 주변국, 즉 조선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 사건으로 표전문제를 둘러싼 홍무제와 정도전이 갈등입니다. 홍무제는 정도전이 여진족과 내통하고, 명에 적대적인 행위를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표전을 구실로 난징으로 불러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더불어 명의 가중되는 위압이 오히려 조선을 더욱 반발하게 만들어 정도전을 태조의 승인을 받아 요동 공격을 준비하였습니다.또한 요동 정벌 계획 추진을 통해 정도전은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정도전을 이성계를 앞에 세워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초기는 공신, 왕자들이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을 요동 정벌 계획을 추진하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요동은 중국, 만주, 한반도를 연결하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이곳을 지배함으로서 지역 패권에 우위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황제권이 아직 강하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이를 이용해 정도전은 요동을 정벌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홍무제의 사망과 왕자의 난으로 태종이 즉위하면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개선되면서 요동 정벌 계획은 파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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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도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과 관련한 역사 기록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지>에 “유주의 요동군 양평현 출신 공손도(公孫度, 150년~204년)는 아버지를 따라 현도군으로 옮겨 살다가, 189년 같은 고향인 서영의 추천으로 당시 한나라 승상 동탁에게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 내부에서 민란인 ‘황건의 난’이 일어나 외부인 요동을 넘볼 여력도 없던 차에 마침 그쪽 지역에 밝은 공손도가 스스로 요동태수가 되겠다고 나서니 그냥 추인했거나 그러한 사실이 없음에도 첨가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즉, 한(나중에 위)와 고구려 사이인 요동 지역에 공손씨 세력이 50여년 동안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습니다.당시 고구려는 고국천왕이 죽고 동생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삼국사기>따르면 고구려 고국천왕 사후 발기가 동생 산상왕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공손도에게 망명하고, 발기는 공손도에게서 3만 명을 지원받아 고구려로 쳐들어갔지만 동생 계수(산상왕)와 을파소에게 패하고 자살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97)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 산산왕 원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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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돌날은 어떤 도구였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좀돌날은 세석기, 잔돌날이라 하며 매우 작은 돌날로 후기 구석기시대의 고도로 발전된 제작 기술을 보여 주는 석기입니다. 뼈 또는 뿔, 나무 등에 장착하여 이음도구의 날로 이용되었습니다. 주로 응회암, 유문암, 이암, 혼펠스, 혈암, 흑요석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눌러떼기 기술을 활용하여, 크기가 규격화된 좀돌날이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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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우제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에도 기우제에는 국왕 이하 사람들이 근신하고, 천지 · 산천 · 종묘 · 부처 · 용신에게 제를 지냈다. 비가 내리도록 비는 법회(法會)도 열고, 도교의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도 올렸습니다. 그중에서도 무당을 모아 비가 내리도록 비는 취무도우(聚巫禱雨)의 기록이다. 많을 때에는 300명, 긴 날짜로는 6일씩, 흙으로 용을 만들고 비가 내리도록 빌었습니다.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기우제는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의 연중행사였습니다. 이렇게 나라에서 지내던 기우제 중에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의 12제차가 있어서 각 명산 · 대천 · 종묘 · 사직 · 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가 있었습니다. 12제차는 가뭄의 정도에 따라서 5월에 1차, 6월에 2차를 지내기도 하고, 5월에 5차까지, 6월에 8차까지 하기도 하고, 심하면 4월에 10차까지 하고 5월에 12차까지 다 끝내는 때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무속 기우제와 승려와 어린아이도 참여하였으며 도교식 의례도 행해졌고 관원이 진행하는 유교식 의례도 정착되었습니다. 기우대상도 산천기우제의 대상이 되는 곳 외에 종묘·사직·우사단·풍운뇌우단·북교·소격전 등을 대상으로 기우제가 행해졌습니다. 국가의례에 대한 유교적 이해가 심화되면서 무속 기우제 중단에 대한 논의가 성종 때부터 시작되는데, 이어 많은 논의를 거쳐 숙종 때에 12제차의 국행 기우제의 과정이 확립됩니다. 그러면서 무속 기우제는 국행 기우제에서 배제되어 인조 25년(1647)에 종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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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ZONE는 언제부터 시작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천시가 2023년 의료시설 주변의 보행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의료시설 주변에 안전안심구역, H zone(hospital zone)을 지정했습니다. 인천시는 대형병원 주변 최대 1km 이내 보행안전안심 디자인 가이드라인 개발 시범사업 대상지, 길병원과 남동구 일원에 5월 중 설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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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원종은 무신세력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종이 무신 정권을 무신들간의 권력 쟁탈로 인해 스스로의 세력 약화입니다. 1258년(고종 45년)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과 유경, 임연은 권력을 장악하으며, 개경환도를 거부하던 김준은 1268년(원종 9년) 12월,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두번째로는 원종의 배후에는 원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김준이 살해된 이후 실권을 잡은 임연은 1269년(원종 9년) 6월,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원종의 아우인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왕으로 옹립 원종을 별궁에 유폐하였습니다. 태자(충렬왕)가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자, 같은 해 11월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켰니다. 이후 원종의 밀명을 받은 송송례, 홍규 등에 의해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 복구가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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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의 지명의 역사적 유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낙향하여 절로 들어가는 길에 우연히 이 곳에 들렀는데, 주변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동백섬 동쪽 벼랑의 넓은 바위 위에 ‘해운대(海雲臺)’라고 음각으로 새긴 데에서 현재의 지명이 유래하였습니다. 본래 대(臺)는 높고 평평한 지형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해운대 역시 달맞이고개와 그 주변을 가리킵니다.해운대는 태종대·몰운대·신선대·오륜대·의상대·겸효대·강선대와 함께 부산팔경의 하나이며, 해운대 자체에도 팔경이 있을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다. 현재 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온천, 고급관광호텔 등이 있어 우리나라 제일의 관광지입니다. 2001년에 벡스코(BEXCO)가 준공되고, 2005년에는 APEC 정상회담이 동백섬에서 개최되는 등 국제컨벤션 중심지로도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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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는 무엇이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째 유대교 신자는 예수가 구세주(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삼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였음을 부정합니다. 유대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 위 선자, 위험한 이단 등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였다고 믿습니다. 두번째, 유대교인은 단 하나의 하나님만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자신을 계시하였다고 믿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입니다. 세번째, 유대교는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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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공포정치가 시행되었던 시기와 결과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질문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마도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 정치를 묻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 공포 정치는 1793년 6월부터 1794년 7월까지를 말합니다. 공포 정치 기간에 로베스피에르 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반혁명파, 온건파, 투사 등 반대파의 인물을 차례로 숙청합니다. 처형당한 인물은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데뮬랭의 아내) 등 수 많은 인사들이 이 기간 처형 당합니다. 공포 정치 기간 동안 파리에서만 약 1,400명이나 처형이 이뤄졌으며, 프랑스 전체적으로는 약 2만명이 처형되었습니다.프랑스 혁명 중 입법 의회가 붕괴되고 1792년 9월 국민공회 들어서고, 공화정을 선포하고 재판을 거쳐 루이 16세를 처형합니다. 이에 놀란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대프랑스 동맹군을 맺어 프랑스를 공격하였습니다. 국민 공회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반란으로 위기에 처하자 자코뱅파는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온건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공포정치가 시작됩니다.로베스피에르는 공안 위원회와 혁명 재판소를 통해 반혁명 세력을 처형하며 공포 정치를 펼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결국 로베스피에르 일파가 테르미도르 반동(1794.7)으로 몰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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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원래부터 섬이었을까요? 아니면 육지였다가 떨어진걸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주도의 화산활동은 신생대 4기(약 180만년저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수만 년 주기로 반복되는 시기입니다. 당시느 빙하기와 간빙기 교차에 의해 해수면이 130m씩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였습니다. 따라서 제주 형성 이전의 남해 지역은 빙하기 때는 육지(평야지대)가 되었다가 간빙기가 되면 수심 100m의 대륙붕이 반복되었습니다.제주도는 크게 다섯단계로 나누어 형성되었는데, 첫 단계는 기저현무암의 섬의 분출하여 순상화산체를 만든 120만년전, 두번째는 100만년전의 서귀포층 퇴적기, 세째 단계는 41만년전까지 가장 많은 양의 용암 분출되어 제주데어 가장 넓은 지표 지질 구성, 네번째 단계는 한라산체, 마지막 단계는 20만년전~2만 5천년까지 오름 및 백록담, 마지막으로 형성됩니다.따라서 제주도는 신생대 제 4기의 빙하기, 간빙기가 반복되는 시기이기에 육지와 바다를 반복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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