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평화광장의 옛날이름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목포의 "평화광장"은 미관광장이었습니다. 미관광장은 보기 좋고 아름답게 만든 광장이라는 의미이고, 평화광장은 평화의 의미를 담은 광장이란 뜻입니다.미관광장이 '평화광장'으로 이름을 변경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에 대한 기념으로 2000년 전후에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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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후 추와 신나라 장수 엄우 기록은 사실에 가깝나요?
중국 측 기록인 <한서> 왕망전, 또는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신'의 장수 엄우가 고려 후 추을 유인해 목을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고 나옵니다. 반면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이 사건의 대상이 '연비'로 적혀 잇어 중국 사료의 추와 이름이 다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다면 엄우가 죽인 대상은 고구려 후(왕)이 아니라 장수를 왕으로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엄우가 고구려측 핵심 인물을 죽인 것은 사실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왕이진, 장수였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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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코르셋이 유행하게 된 계기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코르셋은 이미 16세기부터 있었지만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 중산층과 노동계층까지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순종적이고 단정한 여성성을 보여주는 옷차림의 상징입니다. 당시 여성들이 불편함과 건강 문제를 감수한 이유는 그만큼 코르셋이 사회적 기대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코르셋을 하지 않으면 흐트러진 몸, 느슨한 품행으로 보일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상류층에서 시작된 규범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노동계층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즉, 코르셋은 미용 도구면서 동시에 계층 상승의 욕망도 내포된 옷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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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은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나요?
고구려 장수왕의 장수 비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수 없습니다. 장수왕은 기록에 따르면 413~490년으로 77년간 재위햇으며, 출생 연도인 394년을 고려하면 90세 안팎으로 산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습관을 가지고 건강을 관리했는지는 관련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왕실의 생활은 일반 평민들의 삶보다는 안정적이고, 좋은 식사와 거처, 경호와 휴식으로 오래 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와 같은 고대 기록의 오류에 따른 의문이 듭니다. 고대 사서에서 연도 계산이 1년씩 어긋나는 경우가 있고 장수왕의 즉위 연도도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 상에서 차이로 논쟁거리가 됩니다. 전반적으로 장수왕이 오래 살았을 확률은 높지만 사료 부족으로 그 요인을 파악하기 어렵고, 기록상으로도 의문시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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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머리가 좋았나요? 무력이 강했나요?
진흥왕은 무력형 군주가 아닌 전략형 군주로 평가됩니다. 진흥왕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대가야와 함경도 지역까지도 진출하였습니다. 이런 성과는 전략적 타이밍과 외교, 군사 조합의 결과로 해석됩니다. 진흥왕은 백제와 고구려가 충동하는 틈을 이용하여 한강을 차지하고, 백제의 성왕을 배신하고 한강 하류까지 차지하여 삼국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그는 가야계 출신의 김무력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지휘형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차지한 영토를 둘러보고 순수비를 세우는 등 역동적으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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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원은 왜 학문과 지식 보존의 중심지가 됐나요?
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서유럽은 전쟁과 혼란으로 엉망으로 고대 문헌이 사라지기 쉬웠으나 수도원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 교육, 필사, 보관 공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수도사들은 라틴어 문헌을 손으로 베끼고 교정하며 보존했으며, 노동과 기도, 학문을 함께 중시했습니다. 수도원과 교회의 부속학교에서는 성직자들이 지역의 아동들에게 기본적인 7자유과를 중심으로 학문을 교육했습니다. 나아가 수도원은 신학뿐만아니라 문법, 논리학, 수사학 같은 학문을 이어 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훗날 대학과 르네상스의 토대도 마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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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바늘로 시간과 분 등을 알려주는 시계는 누가 최초로 발명했나여? 답글 바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있는 시각과 분을 보여는 기계식 시계는 여러 사람이 개량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잇는 기계식 시계는 보통 1344년 이탈리에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종을 울려 시간을 아리는 장치를 먼저 발전했고, 그 다음에 톱니바퀴와 추, 이스케이프먼트를 쓰는 순수 기계식 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장치는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임을 나눠주기 때문에 시간 측정이 훨씬 안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우선 시침이 먼저 생기고, 분침은 17세기 후반 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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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해로라는 표현의 유래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궁금증
‘백년해로(百年偕老)’는 부부가 평생 함께 오래도록 화목하게 지낸다는 뜻의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결혼 축하 덕담으로 쓰이지만, 원래도 부부의 오래된 화합과 동반을 기원하는 표현이었습니다.중국 고전인 <시경>의 격고에 나오는 “집자지수(執子之手), 여자해로(與子偕老)”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뜻은 “당신의 손을 잡고 함께 늙어가겠다”는 식으로, 부부의 동반과 약속을 상징합니다.다만 지금 우리가 쓰는 백년은 100년을 뜻하기 보다는 아주 오래, 평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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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사는 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식을 치렀나요?
중세의 3 신분은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특히 싸우는 사람은 기사는 최고위 왕에서 부터 말단 기사에 이르기까지 주종 관계로 서열화되었는데, 이들은 토지를 매개로 하여 쌍무적 계약 관계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주군과 봉신 관계는 기사 서임을 통해 성립되는데, 주군에게 군사 지원과 충성을 제공하고, 주군은 봉신을 기사로 서임하면서 봉토를 수여하고 보호를 제공하는 약속을 합니다. 의식이 중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중세에는 국가보다 개인 간 관계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왕권과 법 체계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아서, 누가 누구의 사람인지 분명히 표시하는 상징 행위가 필요했습니다. 손을 맞잡거나 무릎을 꿇는 동작, 성소에서의 맹세 같은 형식은 그 관계를 신성하고도 법적으로 묶는 장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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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과 승리한 연합국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입니다. 핵심은 독일의 군사력 팽창을 강하게 제한되고, 전후 질서를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주요 내용은 독일이 전쟁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는 것을 약속했습니다. 또한 징병제를 페지하고, 군사력을 제한합니다. 그리고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약속했습니다. 또한 전쟁 방지와 국제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연맹을 창설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독일의 약화를 위해 너무 가혹한 보복으로 독일 내 불만을 키워 나치가 성장할 수 있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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