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나당 전쟁 시작의 이유와 전개 그리고 결과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 김춘추와 당 태종이 만나 나당 동맹을 결성할 때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이 차지하고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고 나니 당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는 안동도호부를, 백제의 옛 영토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적으로 한반도를 다스리려는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늘 자신들을 짓누르던 패배의식과 불안감의 원인인 한반도가 완전한 자기네 땅이어야 안심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원래도 당의 목적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나면 상대적으로 약한 신라를 나중에 다 집어삼켜서 한반도 전체를 당의 손아귀에 넣는 것을 목표로 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하지만 신라는 철저한 전쟁 준비와 고구려부흥세력을 포섭하는 등 하여 웅진도독부를 쳐내고 백제의 옛 땅을 회복하였습니다. 신라도 당과 손절할 시기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이 있었으나, 토번국도 견제해야 해서 계속해서 나당전쟁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은 버리지 못해 패퇴하여 요동으로 옮긴 웅진도독부 건안성에 백제유민을 옮기고,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대방군왕에 봉하여 이른바 소백제국의 세우고 한반도의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유민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멸망한 고구려의 옛 땅과 그보다 더 넒은 영토를 차지한 대진국 발해의 등장으로 당은 더이상의 한반도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됩니다.지금도 그렇지만, 한반도는 산지형으로 되어있어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이고, 삼면이 바다로 되어있어 무역과 교역에 탁월한 입지이며, 비옥한 토지로 곡창지대가 많아 식량조달에 좋은 전초기지가 될 수 있으니 당에서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였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학문 /
역사
23.07.24
0
0
과거 임금의 나이가 어린상태에서 즉위했다면, 나랏일은 어떻게 보살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렴청정이라고 하여 왕의 뒷자리에 왕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발을 드리우고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왕가의 여자 어른인 대비 또는 대왕대비가 했던 것이었죠. 발을 드리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당시는 여자가 나서서 정치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보통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단종의 경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수렴청정을 할 어머니나 할머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문종이 죽기 전에 고위 신하들에게 단종의 보필을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도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하면 어김 없이 왕권과 권력의 찬탈을 위한 시끄러운 일들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7.24
0
0
상의 티샤츠 가로, 세로 줄무니 옷 입는 사람 성향이 다른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각적으로는 가로 줄무늬가 세로 줄무늬보다 뚱뚱해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로 줄무늬의 평행성의 간격이 넓거나 두꺼운 경우에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줄무늬가 가늘고 그 간격 또한 좁다고 한다면 자신의 체형을 고려하여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서 가로 줄무늬 옷을 추천하고, 크게 보이기 위해서 세로 줄무늬 옷을 선택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이용해서 이럴 때는 가로 줄무늬가 더 날씬해보이게 하는 착시를 가져옵니다. 심리적으로는 세로 줄무늬는 직선적, 상승에의 욕구, 공격적, 가로 줄무늬는 안정적, 평등, 자유로움 등을 표출한다고 하기도 하나 그냥 가로와 세로의 줄무늬를 선호하는 것은 기호의 차이로 보입니다. 한때 예술가적 표현으로 일탈, 자유로움의 상징이 줄무늬였는데(이것은 가로 줄무늬) 그것은 과거 마린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선원들은 대부분 가로 줄무늬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어떤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신분의 차이로 배에서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이러한 복장을 하였습니다. 이후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드넓은 바다를 헤쳐나가는 것에서 자유로움, 일상에서의 탈출 등 일탈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피카소도 가로 줄무늬 티셔츠를 즐겨입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저는 가로 줄무늬, 세로 줄무늬 다 입는데 어떤 것을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학문 /
미술
23.07.24
0
0
성경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기독교에서는 이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성경에서는 남녀의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대교에서 파생되어 발전해왔으니 뿌리가 같습니다. 지금은 유대교, 기독교(개신교, 카톨릭)로 나뉘어져 있지만 랍비, 목사, 신부 모두 남성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부속적인 사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3.07.21
0
0
유교사상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전파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명의 성리학이 고려 시대에 신진사대부들에게 전파되어 그 학문적 사상의 기반이 되었고, 고려 말 혼돈의 시대에 신진사대부 중 정도전 외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북방 세력인 이성계의 세력과 함께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정도전이 설계하여 성리학의 기반 위에 국가를 새로이 세우고,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학자들이 국정에 대해 논하며 만들어가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조선은 초기부터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그동안의 폐해를 들어 억제하고 성리학이 기반이 된 유교사상을 도입하여 숭유억불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관혼상제 모두를 유교사상을 접목하여 하게끔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되었기에 발전하였고, 조선 중후기에 들어 너무 학문적 유토피아만 꿈꾸는 것이 아닌가 하여 몇몇 학자들 사이에 실제 생활과 밀접한 학문이 필요하다 하여 소위 실사구시, 실학 사상이 대두되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유교사상은 퇴화되지 않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중국보다 더 우리 실정에 맞는 유교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니 언젠가는 그 색이 바래지 않을까 합니다.
학문 /
역사
23.07.19
0
0
궁예의 관심법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지칭하고, 영험한 능력이 있다고 포장하여, 관심법, 즉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다고 하며, 자신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확인했다고 하며, 그에게 죄를 물어 처벌 또는 처형을 하는 폭정의 수단이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7.19
0
0
설총이 만든 문자 ‘이두’는 어떤 형태였나요? 한글과는 어떤 점이 다른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설총이 고안한 이두는 문자가 아니라 당시의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말의 어순에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온 표기법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잘 표현한 내용이 있어서 가져와 봅니다 .위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동요 비행기를 당시 이두식 표기법으로 바꾸어 본 것입니다. 떴다 떴다의 경우 '떴'은 '뜨나', '날다'의 뜻이므로 飛(날 비)자를 가져왔고 '다'는 음만 차용하여 多(많을 다)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높이 높이의 경우 '높'은 高(높을 고)를, '이'는 음만 차용하여 耳(귀 이)를 가져왔습니다. 즉 명사, 동사, 어간 등 뜻이 있는 한자를 쓰고, 조사나 어미에는 음만 차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원래 중국어의 어순은 우리말의 어순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이러한 이두식 표현법은 한자를 알고 있으면 우리말의 어순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신라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학문 /
미술
23.07.18
0
0
바다를 뜻하는 영어단어에 대한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씀주신 바다와 그 지역을 뜻하는 단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beach : an area covered with sand or small rocks that is next to an ocean - 모래사장, 자갈이 있는 해변, 바닷가를 뜻합니다.coast : the land along or near a sea or ocean - 바다와 큰 땅이 맞닿아 있는 지점, 해안 경계로 만들어진 지역을 뜻하는데 사람들이 사는 마을(지방)이 만들어진 곳을 지칭합니다.ocean : the salt water that covers much of the Earth's surface - 일반적인 바다보다는 구체적으로 특정된 큰 바다를 뜻합니다.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 등sea : the salt water that covers much of the Earth's surface - 일반적 의미의 바다를 뜻합니다.추가적으로,shore : he land along the edge of an area of water - 호수든 바다든 땅과 맞닿아있는 해안을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bay : a large area of water that is part of an ocean or lake and partly surrounded by land - 섬처럼 동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육지를 둘러써 물이 들어와있는 지역을 뜻합니다.
학문 /
문학
23.07.17
0
0
조선 건국 초기, 왜 고려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라가 바뀌었을 때 초기에는 급작스런 변화에 국정 운영이 혼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기틀은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에 고려의 정치 및 행정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간 것도 있고, 폐지하거나 변경한 것도 있습니다. 고려 말에 들어서는 전반적인 관료 조직의 형태가 중앙집권 체제로 많이 자리 잡아 있었던, 중국의 관료 조직을 수용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왕권 확립을 위하여 관료 조직은 그대로 가지고 가되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등에 제제를 가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져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 때는 왕권을 약화하고, 재상 즉 고위 관리들(성리학자)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습니다. 신진사대부로 조선건국 주축이었던 정도전이 불씨잡변이라는 책도 썼었으며, 행정, 문화, 사회 전반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경국전이 편찬되었습니다. 이후 이 조선경국전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죽이고,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 고위 관리, 권문세족들의 역성 혁명 위협으로부터 왕권을 보호하여 군은 국가만이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의정부 6조직계제 시스템을 가지고 갔고, 지방은 8도 체제를 정립시키고 고려 시대와는 달리 모든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8도에는 관찰사를, 부, 목, 군, 현에는 수령과 향리를 파견하였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권력이 있었으나, 조선의 향리는 권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단순 공무원이었습니다. 성리학자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림은 유향소(여론형성), 서원(인재양성), 향약(농민관리)을 통해서 지방의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중앙 정부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 경재소를 만들어 유향소를 감시하였습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인재등용에 있어서 천거와 문음(음서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위관직에는 불가능하게 제도를 개선하였고,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오를 수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나누어 실시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무과는 없었으나 신설되었고, 불교국가라 승과를 시행하던 고려와는 달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 시대에는 승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후 왕의 성향에 따라 중앙집권을 느슨하게 했다가 조였다가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시대는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주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07.14
0
0
한국 원불교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지는 않은 것으로 앎니다 누가 원불교를 창시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불교는 1916년 4월 28일에 여러 종교 및 사상의 수행자였던 소태산 박중빈이 창시한 새로운 종교로 일원상의 진리와 함께 불법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이름이 원불교라 불교 내 하나의 종파로 오해할 수 있지만, 불교계에서도 다르게 보고 있는 별개의 종교라고 합니다. 창시자가 불교, 동학, 도교, 유교, 기독교의 경전을 두루 공부하던 수행자였는데, 그 중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가장 감명을 받아 불교의 법문과 논리가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았고, 임시 교명으로 사용하다가 1943년 6월 1일 박중빈은 대종사의 이름으로 열반(사망)하였고, 2대 대종사로 정산 송규가 이어받았고, 일제에서 해방된 후 1948년에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7.12
0
0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