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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나눌때 광역시가 되기위한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6개의 광역시 인구가 백만명이 넘는군요.광역시가 되기 위해 주변의 지역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면,인구 백만명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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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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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를 통일한 왕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춘추는 태종무열왕이고 즉위한 지, 8년만에 AD661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문무왕은 김춘추와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이름은 법민(法敏)입니다.그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죽자, 왕위를 계승하여 문무왕이 되었습니다.그는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660년에 백제를 정복했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왕위에 올라, 668년 고구려를 정복했으며,나당전쟁에서 당나라군대를 격퇴하여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루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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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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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잖아요? 기독교는 왜 일요일에 예배 하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이고, 그 날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주의 날', '주일'이라고 기독교에서 부르네요.초기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요일에 예배했다고 할 수는 없고,가정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으면 언제든지 모였던 것 같습니다.공동생활을 하는 그룹들도 있었다고 하네요.지금 수도원을 생각해 보면 비슷한 방식이 있었겠죠.당시 유대인들이 살던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전역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때문에,로마황제가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핍박을 했고, 정상적 생활이 어려워 외딴 곳에서, 또는 무덤으로 사용되던 깊은 굴 속 같은 곳에 집단생활도 했죠. 그런데 동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AD313년에는 서로마도 기독교를 인정해 줍니다.이렇게 되자, 로마제국 시민들의 80%가 기독교인이었다는 통계도 있네요.아마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교황 사이에는 일요일을 예배하는 날로 정하는 것이 서로에게 편리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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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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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문화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재미있는 질문입니다.우리나라는 망자의 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 이유는 조상의 영혼이 현실세계에 관여한다고 생각하는 미신때문인데요.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도 평생 가꾸며 땀 흘리셨던 선산에 남향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곳에 묻혀 계십니다.이렇게 묘를 만들면, 관리를 해야하죠.지난번 벌초 때에도 소나무, 떡갈나무의 씨앗이 날아와 주변에서 발아해 자라더군요.뿌리채 뽑아내지 않는다면, 매년 자라는 나무, 잡목, 잡초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집성촌이었던 마을의 선산에 묻혀 계시니,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 항상 보고 지나가게 되고,아들인 제가 눈치가 보여서라도 그 무덤을 무성하게 우거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요.제가 일본 오사카에 갔을 때 본 묘지들은 그냥 작은 비석 하나씩만 세워 두고,후손들이 찾아오면 바가지에 물 한 번 떠서 비석에 붓도록 해 놓았더군요.일본에 사셨던 우리 동포들이 만든 현대식 사찰같은 납골당도 인상적이었습니다.반평정도되는 방이 마련되어 있고, CCTV로 후손들이 언제든 망자의 위패를 볼 수 있도록 했더군요.전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무덤은 평토장 되어 있고, 비석들만 표시되어 있더군요.크기도 모두 동일하게 보였습니다.우리나라는 좀 달라서 무덤을 아주 크게 만들고, 남편과 아내의 무덤도 구별하죠.그러나 이제 대부분 화장 후 납골당에 모시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동일한 납골당에 가족이나 후손들이 모두 같이 안치되어도 될 것 같네요.공동묘지나 납골당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우리나라가 가장 심한 것 같습니다.외국을 가 보면, 도심 한 가운데 무덤이 있더라구요.마치 공원처럼 아무런 위화감 없이 조성되어 있고, 공동묘지에서 책도 읽고 산책도 하고 뭐 그러던데.우리나라는 귀신문화가 있어서인지, 무덤이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한 것은 볼 수가 없네요.일본의 CCTV로 24시간 비춰주는 위폐 모신 납골당은 사업 아이템으로도 괜찮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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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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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선수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7년 6월 20일, 대한올림픽위원회(KOC)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했고, 1948년 스위스 동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했으며, 한국선수단은 정월타 단장과 최용진 감독의 인솔로 이효창, 이종국, 문동성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트 경기에 참가했습니다.하계 올림픽도 같은 해에 런던올림픽에 참가했는데, 1948. 7. 29 ~ 8. 14 영국 런던, 제 14회 하계올림픽에 하계올림픽에 대한민국 이름으로는 처음 출전했고,정항범단장과 선수 50명이 육상, 역도, 레슬링, 축구, 농구, 사이클, 복싱, 7개 종목에 출전해 동매달 2개를 획득, 32위를 기록했습니다.역도 미들급 김성집과 복싱 플라이급 한수안이 각각 동메달을 목에 걸었죠.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메달은 앞서 밝힌 1948년 영국 런던 하계올림픽에서 역도 미들급에 김성집이 딴 동메달이며, 우리나라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은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하계올림픽에서 양정모선수가 획득한 레슬링(자유형) 62kg급 금메달이죠.양정모선수는 숙적 라이벌이었던 몽골의 오이도프와 결승에서 점수차로는 8:10으로 졌지만, 당시 레슬링의 벌점 제도때문에 양정모는 이 경기 패배로 벌점 3점, 오이도프는 이미 벌점 4점인 상태였으므로, 양정모 선수가 경기에서는 지고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올림픽 하면, 마라톤이고, 마라톤 하면 손기정을 떠올릴 수 있죠.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 남승룡과 손기정이 일본 대표 선발전에 참가합니다.일본은 이 두 선수를 제외시키려고 전대미문의 현지 2차 선발전도 치렀습니다.일본선수들을 지름길로 코스 이탈해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최선을 다했고, 결국 두 사람은 2차테스트도 1, 2위를 차지합니다.그렇게 출전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손기정은 금메달을 따내었는데,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으로 기록되었습니다.이후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대면했고, 한민족 중 아돌프 히틀러를 대면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죠.이 경기에서 남승룡도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독일 방송은 "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조선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눌렀습니다)라고 보도했습니다.현대사가 우여곡절이 많기때문에, IOC에 가국에서 참가자의 국적변경 요청이 많이 들어오지만, 변경사항을 게재해 주고, 수상 당시의 국적을 변경해 주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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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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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나 상가집등에서 주로 검정색 옷을 입는데..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상조복장은 대부분 검은색으로 통일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유는 문상하는 마음가짐을 드러내는 것이겠죠.조선시대 우리나라에 검은 색 옷감이 없었을 테니,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나 삼베 색깔의 옷을 입었죠.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검은 계통의 색 옷이 단정함을 나타내기때문에 검은 색 옷을 입기 시작했을 것입니다.그래서 외투와 모자, 양말까지 신경이 쓰이는 데요.아무래도 화려한 색이나 알록달록한 무늬는 단정함을 표현하기는 어려우니 조심스럽겠죠.요즘 상가에 문상을 갈 때, 특별히 검은색 양복이나, 넥타이, 검은 양말을 챙기지 않은 경우도 종종 보이는데요.이는 현대인의 자유로운 사고방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특히 검은색은 상조회사의 입장에서 가장 편리한데요.과거 상복을 모두 장지에서 불태우던 관습과는 달리, 상주들도 입었던 옷을 상조회사에 반납하고, 상조회사는 세탁해 재활용하죠.흰색을 세탁하는 것보다는 검은색을 세탁하는 것이 편리하기때문에 상조회사들은 검은색 상주복을 대여하는 것 같습니다.맏상주가 누군지 확인할 수 있도록 완장에 2줄을, 맏상주가 아니면 1줄의 완장을 차도록 하기도 하는데, 문상 온 사람들이 상주를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일본 문화라고 하는 말도 있네요.일본 문화라고 하기에는 세계 각국의 장례식을 보면, 검은색 복장을 하고 있으니, 굳이 일본문화라고 하기엔 좀 그렇죠?만약 일본문화를 배척하고, 우리 전통문화를 살리려면, 흰색계통의 옷을 입을 수는 있겠지만,조금만 생각해 보면, 불태워 없애는 것도 무리가 있고, 흰색계통의 옷을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상주나 문상을 하는 사람이나 단정하게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검은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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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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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글이 양반사회에 정착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셨기때문에, 대놓고 한글을 비하 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문종도 연산군도 한글에 대한 정리를 한 기록이 있고,연산군은 왕궁에 있던 궁녀가 한글로 보낸 편지때문에, 심문을 했다는 기록도 있고,숙종은 훈민정음 후서를 썼다고 하는 데, 어떤 책인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숙종 때 남구만이, "요새 식년시에 구송만 시키니까 시골 애들은 아예 언문으로 공부해서 한문으로 서찰도 못 쓰는 것들이 과거급제자라고 들어오는 데 이러니까 삼사에서는 쓸 사람이 없어 허덕이죠."라고 말했다네요.초기부터 양반들도 한글을 한자 음표기에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양반이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한글을 사용한 것 같기도 합니다.한글이 창제된 후 곧바로 양반들도 한글을 기록에 사용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한글이 양반들 사이에서 천대를 받았는 지의 문제는 세종의 후손이 계속 왕을 이어간 조선에서 양반이 대놓고 선대의 조상이 창제한 한글을 천대하는 발언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양반들 사이에 한글이 정착이 되지 않았다고 전제하는 것은 어떤 근거로 하시는 생각일까요?숙종 때 남구만의 한탄스러운 언급을 보아, 조선의 과거제를 한글로만 치렀다는 기록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겠죠. 연산군도 한문 책을 한글로 번역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고, 숙종은 직접 한글로 책을 썼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기록을 무시하고 한글은 양반들에게 천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걸 바꿀 필요가 있겠죠.언문이라는 말도 세종대왕이 직접 언문청을 두라고 하셨기에, 이 언문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한글을 비하하는 단어로 인식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양반의 기록에서 언문을 비하하는 문장이 없기때문이죠. 한글을 비하하는 것은 선대 세종대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 테니까요.암클도 있는데, 여자들의 글이라고 암클이라 한 것 같습니다.이 단어를 한글비하, 여성비하로 생각할 수 있겠는데,오히려 양반사회에서 여성이 한문보다 한글을 더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죠.중글이라하여 중(스님)이 쓰는 글,상말글은 상스러운 말을 적는 글이나, 상놈들이나 적는 글이라는 표현이 될 수도 있겠죠.반절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한자가 두 글자를 합하여 만든 단어라는 의미였기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만난다고 반절이라 불렀네요.이런 훈민정음 또는 한글에 붙여진 이름들을 한글을 비하하는 뜻으로 해석해야하는 지, 아니면 한글의 쓰임새를 표현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죠.그리고 양반사회에 정착된 시기는 창제되고부터 바로 양반들도 사용한 것 같고요. 왕실도 한글로 편지를 썼다고 하네요.그렇다면, 훈민정음으로 창제되자 마자, 전국 방방곡곡 한글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이 한글의 우수성을 잘 표현하는 것 아닐까요?창제되자 마자, 한글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말을 쓰는 사람은 한글 문자를 배우기가 아주 쉬웠다는 것을 보여주죠.훈민정음, 한글이 천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한글은 한자의 보조 문자 역할을 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문서는 한자로 기록되었고, 개인간 편지같은 것만 한글을 사용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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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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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왜 고기를 드시지 않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스님이 고기를 드시지 않는다는 표현보다는 살생을 하지 마라는 계율을 따르는 것이겠지요.이렇게 해석한다면, 스님이 직접 살생을 하시는 것이 금지된 것이며,살생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도 계율을 어기는 것이므로,직접 잡은 고기나, 살생하는 것을 본 고기를 먹는 것은 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직접 잡은 고기나 살생하는 것을 본 고기가 아니더라도, 고기를 먹는 것을 즐긴다면, 이는 스님의 정진에 도움이 되지 않겠지요.스님이 고기를 먹는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지만,스님이 고기를 드시지 않으시려는 것에 대하여 굳이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드셔도 되지만, 드시지 않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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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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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이유와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문학의 위기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이 쌓였기때문일 것입니다.2차대전 이후, 인류는 멸종위기를 느낍니다.유럽은 물론 아시아에서 인간을 생물학실험대상으로 사용했고,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삼켜버릴 것만 같았습니다.그런데 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원인이 인간의 합리성과 집단지성으로 나치즘과 일본군국주의에 동조한 때문이었죠.UN이 창설되고, 인류가 평화를 사랑하는 듯 보였으나, 전쟁은 곳곳에서 일어났고,그 원인은 여전히 제국의 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소모전 양상이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이명박 전대통령이 대학에서 인문학 지원을 축소하고, 기계공학 지원을 대폭 늘렸고,지금도 이 원칙은 유지되고 있습니다.개인의 삶에서도 더 이상 철학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보다 개인의 삶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경제적 문제와 소확행같은 화두가 미디어를 장악했죠.그러나 그 폐해는 곧바로 드러났고, 개인의 삶은 소외되었고, 신경정신과 질환이 급증했습니다.인문학의 위기라고 불리던 시대는 지나간 것 같고, 지금은 인문학을 그리워하는 시대로 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인문학이라는 화두가 이미 많이 대두되었고, 인문학강의가 많이 제공되는 것 같습니다.대책이랄 게 없이, 흐름, 대세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죠.인문학의 부재가 힘들어 다시 인문학에 기대고, 이제는 집단지성이나 이성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더 진전된 인문학의 장이 열린 거겠죠.
학문 /
철학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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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왜 머리가 빡빡머리인건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처님으로 추앙받는 싯다르타가 출가하면서, 자신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깨달음을 얻는 사문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뽑아 머리카락을 모두 잘랐다고 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무명초(無明草)라고 불리는 머리카락은 번뇌와 망상을 상징하며그래서 삭발은 머리카락과 함께 잡념도 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인 것이죠.
학문 /
철학
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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