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간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 왜라 당시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대패를 하게 되고 2만에 가까운 조선군들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게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명나라로 도망가기 위해 피난길을 오르게 되는데 선조의 이런 피난을 의주 파천 (義州播遷) 또는 의주몽진 (義州蒙塵)이라고도 부릅니다. 선조 피난길의 분위기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가기 위해 의주로 향하면서 백성들에게 교서를 내렸는데 백성들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을 비난했으며 경복궁을 불태워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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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두부를 매우 좋아했던 중국 명나라 황제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두부 자체는 중국에서 마들어 졌지만 조선의 두부 만드는 기술은 중국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세종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백언(白彦)이 조선식 두부를 황제인 선덕제(재위 1425~1435)에게 바쳤더니 황제가 매우 맘에 들어 해서 백언에게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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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땜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원을 사용할수없는걸루아는데?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음원의 길이는 다양합니다. 보통 짧게는 2-3초 부터 길게는 1분 까지 다양 한데 보통 30초 에서 1분 사이의 길이는 무료로 하고 그 이상일 때는 과금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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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때에도 우리나라의 중앙정보부, 안기부 및 이런 기관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안기부나 중앙 정보부와 같은 일을 하는 부서는 없었지만 승정원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임금 직속의 비서기관으로, 오늘날로 치면 대한민국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부서입니다. 조보의 발행처이기도 했으니 행정 안전부의 일부 기능도 수행했던 국가 기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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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서양에서도 해부는 처벌의 대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 해부가 이루어진 것은 중세 시대 입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해부를 직접 시행하지 않고 해부 조수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사인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654)는 직접 해부를 한 후 생생한 해부도를 그렸고, 이를 기반으로 서양 의학은 당시 발전하는 자연과학을 도입하여 의학의 근대를 열게된 시초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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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이 후사 없이 죽게되면 세자책봉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금이 세자 없이 죽으면 동생이 왕이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세자의 동생을 세제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제가 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실 세종 대왕도 양녕 대군이 세자에서 폐세자 되면서 3번째 아들이 세자가 된 경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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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숙종이 시행한 대동법은 무슨 법이고 왜 시행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동법실시 는 숙종이 아니라 광해군의업적 이었으며,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 으로 바치는 것을 쌀로 통일 하게 함으로써 임진왜란 병자호란 인해서 전국적으로 경제악화 되면서 피폐한 국가의 재정을 강화시키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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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골품제도 가운데 성골과 진골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골과 진골의 가장 큰 특징은 진골은 박혁거세의 후손이 아니지만 왕족으로 왕위 계승권이 없는 계급이고, 성골은 박혁 거세의 후손으로 왕위 계승권이 있고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계층이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진성 여왕 이후로는 진골도 왕이 되는 것이 가능 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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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는 당나라의 유학생을 많이 보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640년(선덕여왕 9년) 부터 인데 그러나 그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신라인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삼국통일 후의 당나라 파견 유학생을 지칭하게 되는 견당 유학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였습니다. 유학하는 학생수가 많을 때는 무려 100여 명에 달하였는데, 840년에는 만기된 유학생과 질자(質子) 등 105명이 동시에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학경비 가운데 서적 등의 구입에 필요한 은화 300냥은 본국에서 부담하였으나, 의식에 필요한 경비는 외국유학생의 편의를 도와주는 당나라의 홍로시(鴻魯寺)에서 공급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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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친부는 무엇을 하던 기관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친부(宗親府)는 조선 시대 국왕을 지낸 이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인 왕가·종실·제군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고 합니다. 1895년에 종정사(宗正司)와 종정원(宗正院),1905녀에 종부사(宗簿司)로 이름을 고쳤으나, 2년 후에 폐지되어 관련 업무는 규장각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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