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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빈민구휼은 어떻게 조치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빈민 구제 제도는 고구려의 진대법인데 조선 시대에는 그 제도의 이름을 환곡(還穀)이라 불렀습니다. 還(환)은 되돌린다는 의미 이기에 요즘 재정 정책으로 돈을 잘 굴리듯이, 조선 시대에는 곡식의 흐름을 원활히 하여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의 이름 인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환곡 정책이 점차 이상하게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농민에게 법으로 정한 것보다 많은 이자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 까지 환곡미를 떠넘겨 막대한 이자를 챙기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빌려주지도 않고 빌려준 것처럼 문서를 위조하여 농민을 겁박하고 곡식을 수탈하기까지 했습니다.결국 환곡 제도는 문란의 극치를 이루면서, 후기 조선 사회 혼란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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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로 양귀비 미모를 칭송한 시인 백거이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나라 현종떄의 시인인 백거이는 다작(多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합니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감상시도 유명한데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도 유명할 정도로 현실적인 시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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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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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복에서 왜 장보고로 이름을 바꾼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명 입니다. 이름만 듣고도 다른 사람들은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평민 출신으로 여겨지기에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유는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당시 귀족 가문의 성인 (大姓)인 장씨(張氏)를 모방해 지은 것이고 이름 또한 거기에 맞게 귀한 이름으로 개명 한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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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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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동물 해치의 유례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풍수 지리를 많이 믿는 편이 였습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관악산을 화산이라고 하였는데 목조건물들이 많았던 그 당시에는 특히 화재가 무서운 재앙일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화산인 관악산을 누르고 도성과 궁궐을 위협하는 화마를 제압하기 위해 해치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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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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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산속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절이 주로 산에 있게 된 까닭은 조용하여 수행을 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각종 소음이 들리는 도심이나 마을에서 사회의 모든 향락을 뿌리친 채 자신을 갈고 닦는 공부를 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절의 ㅅ님들은 속세를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 해탈을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더욱 더 조용한 곳이 필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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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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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은 목욕도 신하들이 씻겨줬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실 궁궐에는 별도의 목욕시설이 없었습니다. 왕실은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이 왕이 목욕하는 장소인데 평소 세수를 하는 방이지만 목욕을 할때는 바닥에 기름종이를 깔고 큰 목욕통(목간통)을 가져다 놓는다고 합니다. 이 목욕통은 몸을 완전히 담글 수 있는 크기로 수백년 된 큰 통나무를 파서 만드는데 목욕통은 향이 좋은 소나무나 향나무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고 합니다. 왕이 목욕시 세숫간 상궁과 하인이 따뜻한 물과 찬물을 적절히 배합해 목욕통에 목욕수를 준비하고 목욕준비가 끝나면 시녀상궁이 부드러운 무명수건과 왕이 갈아입을 내복과 의대를 가져다 놓고 나가면 왕은 혼자서 목욕을 하지 않고, 유모격인 봉보부인이 목욕을 시켜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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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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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남아선호사상은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아선호사상은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의 확산과 함께 강화되었으며,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직계가족제도가 강화됨에 따라 더욱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남자만 지내기 때문 이였는데 여성들은 시집을 가면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기에 그런 것도 이유중의 하나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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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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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병역 의무, 조선시대에는 군역은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국방의 의무는 있었습니다. 16~60세의 남성은 대부분 병역의 의무를 지어야 했습니다. 이를 가리켜"양인개병제"라고 하는데, 양인은 양반,상인,농민을 가리키는 말로 예비관료인 유생들 관가와 양반가에 소속된 관,사노비를 제외하면 모두 군대에 가야만 했던 것 입니다. 다만, 당시에도 신체 장애인과 학생, 현직 관료들은 면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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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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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 경매장에서 코나 귀를 만지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과거 경매에서는 코를 만지는 것이 가격을 높여 응찰 하겠다는 의사표현으로 통했기 때문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paddle패들(경매 번호판)이 사용되는 요즘은 코를 만져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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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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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의 신분제는 어떠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는 신분제도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고구려도 귀족, 평민, 노비 등이 존재 했습니다. 왕을 포함한 왕족, 준왕족(俊王族), 5부족의 우두머리인 대가(大加)와 하위 관료군, 호족 등을 가리키는 좌식자(坐食子) 등이 지배계층이며 노예, 농노(農奴), 일반 백성 등이 피 지배계층인 하호(下戶)로 있었다고 전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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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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