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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강경원 전문가
부산진구남성합창단
Q.  구한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75년 조선 왕조 후기 때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인 운요호(雲揚號, 운양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양민 학살과 주변 방화 등의 만행을 저지른 후 물러간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의 시초격인 사건이기도 하다.​봉건적인 막부 체제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이 선포되면서 일본에서는 이를 계기로 근대화 분위기가 장식됨과 동시에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 침략에 대한 노골적인 망상이 고개를 들면서 이에 힘입어 정한론 (정한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까지 가세하게 되자 침략목적으로 조선에 접근하려고 하였다.​이미 1854년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문호 개방을 선포했던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함께 조선에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운운하면서 상호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반양(反洋) 정서로 인하여 실패만 거듭했다가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하야 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이를 계기로 조선의 침략을 위해 군선(軍船)인 운요호를 부산으로 밀파한다. 그것도 자신들이 쿠로후네(미국 페리제독)사건 때 당했던 방식 그대로 차용해서 거의 똑같이 늑약(勒約)이라 할 정도로 근대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게끔 하였다.
Q.  환단고기가 실제로 인정받는 역사서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환단고기』 범례에 의하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1911년에 『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 등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고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한 뒤 인쇄했다고 한다.그런데 편저자인 계연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 계연수는 다음 경신년(1980)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제자인 이유립(李裕岦)에게 남겼다고 한다.그래서인지 『환단고기』는 1979년 수십 부가 영인된 뒤 1982년 일본인 가시마(鹿島昇)가 일역(日譯)하고 원문을 게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세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Q.  청와대는 언제 지어졌는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청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되었던 시설이며, 영빈관 등은 여전히 실무에 활용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세종로)에 위치한다. 광복 이래 이승만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청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공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집무실과 퇴근 후 기거하는 대통령 관저 기능을 가진 대통령궁(大統領宮)이자, 나아가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진 및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행정기구 대통령부(大統領府)를 의미했다.2022년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 부터는 청와대 영빈관 같은 부분적 실용적 시설만 회의, 포럼 등 일부 실무와 행사용 목적으로 적극 사용하고, 그 외 대부분 시설은 국민에게 전면 개방하여 집무실 기능은 하고 있지 않다. 개방 후 청와대는 문화체육관광부 청와대 관리활용추진단이 운영한다.[1]이에 국가기관으로서의 대통령, 또는 대통령비서실을 줄여서 청와대, 청(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 집무실이 이전된 이후에는 청와대라는 표현을 쓸 수 없고 용산 청사의 특별한 이름이 없어 이러한 고유명사보다는 기능적 명칭인 대통령실(大統領室)이 사용되고 있다.[3]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군정사령관 관저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 관저를 이양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로, 조선시대의 지명에 따라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제2공화국 윤보선 전 대통령이 경무대 본관의 청기와 지붕에 착안하여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고 해당 형태로 제5공화국을 지나 민주화를 통해 군사 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노태우 정부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기 말기에 민족의 자존을 높인다는 이유로 한옥 양식의 청와대 본관을 신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대한민국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국가원수로서 청와대에 근무하는 인원들은 국가원수를 보좌하고 명을 받아 행정부의 장관과 차관을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하고 행정부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청와대 근무자, 정치인들과 친분이 형성되고 능력이 있으니까 청와대로 파견 간다는 인식도 있어서 청와대 파견 근무 자체가 경력이 되어 복귀 후 행정부 내에서 입지가 강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권부(權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Q.  실리콘이라는 재료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실리콘 개발을 향한 기나 긴 여정을 통해 놀랍도록 다재다능한 화학물질이 탄생했다. 실리콘은 물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소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광범위한 요구사항을 충족할 수 있는 실리콘의 능력은 특이한 화학적 성질에서 비롯됐다.​지난달 칼럼에서 언급한 1938년에 있었던 General Electric(제너럴일렉트릭)과 Corning Glass Works(코닝글래스웍스)의 만남 이후 상용 실리콘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는 두 개의 경로가 나란히 펼쳐 졌다. ​Corning는 J. Franklin Hyde(J. 프랭클린 하이드)가 그리냐르 반응법을 사용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1942년, 그 작업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추가 자원이 필요했다. Corning은 1943년 초 Dow Chemical과 합작 투자를 통해 미시간주 미들랜드 소재의 Dow Chemical 공장 근처에 Dow Corning(다우코닝)의 플랜트를 건립했다. 유기화학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그리냐르 반응법용 시약이 마그네슘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당시 Dow Chemical은 미국 내에서 마그네슘을 생산하는 유일한 업체였다.​한편, GE 쪽에서는 Eugene Rochow(유진 라코우) 박사가 실리콘 실험에 착수해, 그림 2와 같이 현재의 실리콘이라는 화학물질의 기초가 되는 메틸 실리콘을 생산할 수 있는 실용적 방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1940년 5월, Rochow 박사는 구리를 촉매로 사용해 염화메틸과 실리콘 원소를 반응시켜 메틸 클로로실란을 직접 합성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로써 그리냐르 공정에 의존하지 않고도 Dow의 독점을 효과적으로 깨고 GE가 상용 실리콘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이는 1944년 11월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Q.  아자개가 왕건에게 몸을 의탁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들인 견훤이 아버지인 아자개를 홀대했기 때문이지요.훗날 견훤은 왕건에게 나라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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