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김구선생님이 암살이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배후에 이승만이 있었을것이다.안두희가 총으로 김구선생을 쐇다.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 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서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김구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사건 발생 1시간 24분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이 사건은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이 살인교사 같은 누명을 쓰고 구속됐다.안두희 역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김구와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켜 군에 복귀시켰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 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계급을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켰다.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권의 비호로 대저택까지 지어 떵떵거렸다. 김구 살해 진상규명은 1960년 4.19 혁명 뒤부터인데, 4월 29일에 한 시민이 안두희의 체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게 신호탄이었고, 같은 날 안두희의 집도 분노한 학생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 시기부터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져 6월 26일에 심산 김창숙이 백범 사망 11주기 추모식장에서 "선생을 저격한 안두희를 죽여라! 그리고 그 배후 조종자인 이승만을 규탄하자!"고 절규했다.이에 안두희는 잠적했다가 1961년 4월 17일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동월 28일에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암살사건 배후자 규탄대회'에서 시민 3,000여명이 국회의사당까지 가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그럼에도 안두희는 세인들에게 김구 암살범이라는 낙인을 받아 수차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아왔고, 1987년부터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수차례 응징을 당하며 진실을 고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92년에야 암살과 관련된 증언을 시작하고 백범 묘소에도 참배했다.